jean paul gaultier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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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태생의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1952.4.24~)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디자이너로서의 공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피에르 가르뎅에 의해 18세에 패션계에 입문하였다.
피에르 가르뎅은 1970년 고티에가 보내온 스케치를 보고 그를 조수로 고용하였고, 고티에는 피에르 가르뎅, 자크 에스테렐(Jacques Esterel), 장 파투(Jean Patou) 등의 쿠튀르 하우스를 거치며 일했다.
쿠튀르에서 나와서 1976년 처음으로 자신의 컬렉션을 열었고, 1980년대 내내 ‘프랑스 패션계의 악동 (the enfant terrible of French fashion)’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늘 뉴스를 몰고 다니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쿠튀르에서의 시간은 그가 흠잡을 데 없는 재단법과 테크닉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디자이너에게는 전통적인 프랑스 디자인은 너무 조용하고 지루했다.
1978년 첫 의상컬렉션을 선보인 이래, 고티에는 쿠튀르와 프레타 포르테 여성복, 남성복, 주니어, 향수 등으로 점차 라인을 확장해나갔고, 진, 안경 등 라이선스 사업도 확장해왔다.
피에르 가르뎅이 고티에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두 디자이너는 시대는 달랐지만, 관습적인 디자인을 거부하고 재미가 넘치는 컬렉션으로 유명한 패션계의 전위부대였다.
하지만 피에르 가르뎅의 디자인이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미래주의적인 디자인을 꿈꾸었던 반면, 고티에는 과거의 유산이나 고전적인 디자인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미학으로 새로움을 창조했다.
실제로 고티에 디자인의 대표명사 격인 코르셋 패션이나 브레통 피셔맨 스웨터(Breton fisherman sweater)를 비롯하여 그의 컬렉션에는 기존에 존재했던 것들이 디자이너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전혀 다른 패션이 된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고티에는 “나는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더 편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런던을 흠모하는 파리지엔이었고, 그것은 디자인에 그대로 나타났다.
흔히 파리지엔의 이미지는 무심한 듯 고상하고 진중한 말투인데 반해, 고티에의 얼굴에는 늘 감정이 넘쳤고 좋은 것은 최상급을 사용하여 최대한 증폭해서 말했다.
그는 이것을 영국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이한 유머와 연결시켜 설명했다.
또한 영국인 특유의 유머가 그들의 옷차림에 나타난다고 했다.
고티에는 “영국인들은 자신을 우습게 보이도록 연출하는 반면, 프랑스인들은 언제나 심각하고, 세련되고, 관례에 맞춰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영국인들의 혁신성과 유연성이 그의 전위적인 패션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티에의 디자인은 런던의 펑크룩처럼 파격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과감한 노출과 메이크업, 의외의 무대 연출로 충격을 주지만, 그가 즐겨 사용하는 색채인 아이보리, 새먼 핑크(salmon pink: 연어의 살색처럼 주황기가 도는 연한 분홍색) 등을 살펴보면 고채도의 원색은 피하는 프랑스 문화의 세련됨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성 정체성을 가지고 놀기: 여성성
패션 사학자 발레리 스틸(Valerie Steele)은 “장 폴 고티에가 패션계에 남긴 가장 큰 영향은 사회적으로 정의된 여성과 남성 그리고 그에 따른 정체성(gender, sexuality)의 개념을 가지고 디자인을 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고티에는 패션 디자인을 통해 여성/남성이라는 것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거나, 양성간의 코드를 의도적으로 혼합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마돈나의 원추형 브라(cone bra)다. 전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 의상은 마돈나의 1990년 ‘Blonde Ambition’ 월드 투어를 위해 고티에가 디자인한 것으로, 원추 모양으로 가슴을 강조한 코르셋 형태의 겉옷을 마돈나와 백댄서들이 함께 입었다.
이후에도 이 코르셋 룩과 돌출된 가슴 디자인은 고티에 컬렉션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그가 만든 코르셋은 여성성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으로 페미니즘 운동가들에게 억압의 상징이라고 강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적 할머니가 뷔스티에(bustier: 가슴을 올리기 위해 몸통을 조이도록 만든 속옷)를 입는 것을 도와주면서, 또는 폴리 베르제르 (Folies Bergère: 1869년에 만들어진 파리의 뮤직홀)의 여성 댄서들이 나오는 텔레비전에서 봤던 뷔스티에를 떠올리며, 코르셋을 강한 여성의 상징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실제로 19세기 초, 기마병의 자세를 꼿꼿이 세워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남성들이 코르셋을 입기도 하였는데, 코르셋은 허리를 무조건 조여서 가늘게 만들고자 만든 것이 아니라, 적당히 조여 자세가 교정되면서 체형이 보정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고티에의 코르셋은 속옷을 겉옷으로 입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여성성=나약함’이라는 등식을 깨고 강한 여성, 남근 숭배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이런 성적으로 강력한 여성의 이미지는 1980년대부터 대두된 여권의 신장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마돈나와 장 폴 고티에가 함께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마돈나는 무대에서 근육으로 단련된 몸에 고티에의 섹시한 의상을 입고, 카리스마 있는 20세기 대중문화의 여전사의 모습을 구현했다.
이 속옷을 겉옷으로 입는 섹시한 옷차림은 마돈나 이후 레이디 가가 같은 카리스마 있는 여자 가수의 무대 의상의 전형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성 정체성을 가지고 놀기: 남성성
고티에는 남성복에도 혁신적인 실험을 했다.
그는 의상을 만드는 소재에 있어서는 남녀의 구분이 없음에도, 완성된 의상의 일부 품목에 엄격한 성 구별이 있음을 인식했다.
남성복에서 치마는 스코틀랜드의 킬트(kilt)나 옛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착용했던 치마 형태의 복식이 있었지만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 사실이다.
고티에는 미디에서 맥시에 이르는 다양한 길이의 남성용 치마를 런웨이에 선보였고, 자신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치마를 즐겨 입었다.
고티에의 남성용 스커트는 출시되던 1985년 한 시즌에만 3000벌이 넘게 팔려나갔다.
치마를 입은 남성들은 파리의 식당에서 웨이터가 입은 긴 앞치마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남성을 오히려 더 남성스럽게 연출했다.
스커트는 격식있는 재킷, 두꺼운 양말이나 부츠와 함께 착용되었으며, 초기 사람들의 예상되는 달리 남성성을 입증할 필요가 없는 이성애자들에게 선호되었다고 한다.
고티에가 즐겨 사용하는 레퍼토리 중의 또 하나는 브레통 피셔맨 스웨터(Breton fisherman sweater) 이다.
본인도 즐겨 입었던 이 디자인은 흰색 바탕에 파란색 가로 줄무늬가 있는 스웨터였다.
지금은 마린 룩(marine look)이나 노티컬 룩(nautical look: 피코트, 스트라이프 티셔츠, 세일러 팬츠 등 선원의 복장에서 비롯된 의상)으로 알려진 스타일의 일부인데, 고티에는 이 중 프랑스 브르타뉴(Breton) 지방 어부들의 스웨터를 재해석했다.
브레통 피셔맨 스웨터는 섹시한 남성을 표현했으며, 여성복, 아동복의 디자인으로도 재해석되었다.
새로운 아름다움의 정의: 거리를 쿠튀르로 끌어들이다
고티에는 자신의 디자인이 원래는 파리의 여인들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나, 후에 보이 조지(Boy George) 같은 런던 팝음악의 기이함과 생명력과 펑크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거리는 언제나 첫 번째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기존의 쿠튀리에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것들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새로운 것들을 시도했다.
고티에는 어느 날 고양이 밥을 주려고 깡통을 열다가 깡통의 위와 아래 부분을 잘라내면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넓은 팔찌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티에는 깡통을 잘라서 은도금을 입힌 후 자신의 콜렉션에 사용했다고 한다.
또 비닐, 라텍스, 신축성 있는 튤(tulle: 망사소재), 각종 주방 기구와 같은 하이패션에 어울리지 않은 소재들을 창의적으로 사용했다.
고티에는 처음으로 보통 사람들을 런웨이에 내보낸 디자이너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양한 사이즈의 여성과 남성, 백발의 노인, 온 몸에 문신을 새긴 사람 등 어쩌면 보통보다 더 보통 같은 사람들을 모델로 썼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고티에의 도전은 소재나 인물뿐 아니라 디자인의 주제에서도 계속 되었다.
펑크룩의 새로운 해석과 얼굴까지 다 감싸는 바디슈트 위에 옷을 입힌다거나, 피부를 연상시키는 옷 위에 정맥과 동맥을 그린 후 그 위에 옷을 입혀 착시를 일으키거나, 근육과 혈액의 흐름이 다 노출되어 보이게끔 인체의 안과 겉을 뒤집는 디자인 등 성 정체성에의 도전 이외에도 그는 오늘날까지 다양한 디자인을 시도해오고 있다.
1994년에는 몽골 등 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해석한 에스닉룩을 선보였고,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The Fifth Element)] (1997) 등 상상력을 요하는 영화들의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고티에의 이런 시도들이 늘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93년 ‘Chic Rabbis (멋진 랍비들)’이라는 이름의 컬렉션은 큰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고티에는 하시디즘(Hasidism: 대단히 엄격한 유대교의 한 형태)적인 전통 의복에 대한 헌정이라고 밝혔지만, 그저 또 하나의 패션의 소재일뿐 정통성이 결여되었다 하여 강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그는 2012년 봄/여름 쿠튀르 컬렉션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영국의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에게 헌정했으나 와인하우스를 꼭 닮은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한 모델들이 상업적인 쇼에 올라간 것을 본 가족들과 팬들의 유감을 샀다.
패션 역사가 발레리 스틸은 패션의 역사에서 고티에의 기여는, 여성을 인형같이 꾸미는 모더니즘적인 아름다움과 결별하고, 이전의 추하고 속되고 관습에 거스른다고 여겨지던 것들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한 것이라고 했다.
고티에의 패션은 갖가지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어른들의 놀이이며, 그 일상성에서 아름다움을 구축했다.
그의 쾌활함은 2011년 몬트리올 예술 박물관(Montreal Museum of Fine Arts)에서의 전시회 개막 전야 행사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몬트리올 거리에 요란한 퍼레이드를 이끌며, 요정, 캉캉, 힙합 댄서, 모델들과 함께 행진하였고, 행인들과 사진을 찍으며 축제를 만들었다.
구경꾼들에게 선원 모자를 나눠주고, 함께 나온 개들이 그 모자를 쓰고 뛰어다니며, 에펠탑과 콘 브라 모양의 거대 풍선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광경은 그의 패션 미학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고티에가 의상을 담당한 영화 정보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The Cook The Thief His Wife & Her Lover)
기본정보1989년,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감독피터 그리너웨이
출연리처드 보링제, 마이클 갬본, 헬렌 미렌, 엘렌 하워드
키카 (Kika)
기본정보1993년, 스페인, 프랑스
감독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베로니카 포쿼, 피터 코요테, 빅토리아 아브릴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The City Of Lost Children)
기본정보1995년, 프랑스, 독일, 스페인
감독마르크 카로, 장-피에르 주네
출연론 펄먼, 다니엘 에밀포크, 주디스 비테, 도미니크 삐농
제 5원소 (The Fifth Element)
기본정보1997, 프랑스
감독뤽 베송
출연브루스 윌리스, 게리 올드만, 밀라 요보비치
참고문헌
Loriot, [The Fashion World of Jean Paul Gaultier: From Sidewalk to Catwalk] (The Montreal Museum of Fine Arts, 2011); Martin, R. [The St. James Encyclopedia: A Survey of Style from 1945 to the Present] (Visible Ink Press: Detroit, MI, 1997); 그룸바크, [패션의 역사] (도서출판 창, 1994); Bond, D. [Glamour in Fashion] (Guinness Publishing: London, 1992); Walden, [Jean-Paul Gaultier Interview] < The Telegraph >, 2008. 12. 8. http://fashion.telegraph.co.uk/news-features/TMG8187735/Jean-Paul-Gaultier-interview.html (2010); Robin, [The Fashion World Of Jean Paul Gaultier], Celebrates Premiere At San Francisco's De Young Museum, Huff Post San Francisco Around Town, 2012. 3. 26. http://www.huffingtonpost.com/2012/03/26/jean-paul-gaultier-san-francisco_n_1380523.html (2012)
글 권유진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의류학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수여하고 미국 Iowa Stat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Washington State University에서 조교수로 근무하였고,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재직중이다.
Jean Paul Gaultie
Life and career
Gaultier never received formal training as a designer.
Instead, he started sending sketches to famous couture stylists at an early age.
Pierre Cardin was impressed by his talent and hired him as an assistant in 1970.
Afterwards he worked with Jacques Esterel in 1971 and Jean Patou later that year, then returning to manage the Pierre Cardin boutique in Manila for a year in 1974.
His first individual collection was released in 1976 and his characteristic irreverent style dates from 1981, and he has long been known as the enfant terrible of French fashion.
Many of Gaultier's following collections have been based on street wear, focusing on popular culture, whereas others, particularly his Haute Couture collections, are very formal yet at the same time unusual and playful.
Although most people found his designs decadent at the time, fashion editors, notably Melka Tréanton of Elle, Claude Brouet and Catherine Lardeur of French Marie Claire, were seduced by his creativity and immediately noticed his mastery of tailoring and later launched his career.
In 1985 he introduced man-skirts, and produced sculptured costumes for Madonna during the nineties, starting with her infamous cone bra for her 1990 Blond Ambition Tour, and designed the wardrobe for her 2006 Confessions Tour.
Gaultier has also worked in close collaboration with Wolford Hosiery.
He promoted the use of skirts, especially kilts on men's wardrobe, and the release of designer collections.
Gaultier caused shock by using unconventional models for his exhibitions, like older men and full-figured women, pierced and heavily tattooed models, and by playing with traditional gender roles in the shows.
This earned him both criticism and enormous popularity.
At the end of the 1980s, Gaultier suffered some personal losses, including his lover and business partner Francis Menuge, who died of AIDS-related causes.
Gaultier designed the wardrobe of many motion pictures, including Luc Besson's The Fifth Element, Pedro Almodóvar's Kika, Peter Greenaway's The Cook, the Thief, His Wife & Her Lover, and Jean-Pierre Jeunet's La Cité des enfants perdus.
He currently designs for three collections: his own couture and ready-to-wear lines, for both men and women.
In 1988 Gaultier released a dance single titled "How To Do That" on Fontana records from which came one of the first ever "single title" remix albums "Aow Tou Dou Zat" on Mercury records.
The album includes mixes by Norman Cook, JJ Jeczalik, George Shilling, Mark Saunders, Latin Rascals, David Dorrell, Tim Atkins, Carl Atkins, and Mantronik.
Co-written & produced by Tony Mansfield, video directed by Jean Baptiste Mondino.
The album also featured a collaboration with accordion player Yvette Horner.
Gaultier has designed a number of the costumes and outfits worn by rocker Marilyn Manson, including the outfits for Manson's Golden Age of Grotesque album.
In France the costumes he designed for singer Mylène Farmer gained much attention. In spring 2008 he signed a contract to be again the fashion designer for her tour in 2009.
He's also well known for his exhibit in New York's Metropolitan Museum of Art known as Bravehearts — Men in Skirts.
He has designed the costumes for Kylie Minogue's international KYLIEX2008 tour, as well as the late iconic Hong Kong singer Leslie Cheung, who hired Gaultier to design eight different costumes for the last concert tour before Cheung's death.
In 2012, he was named as a member of the Jury for the Main Competition at the 2012 Cannes Film Festival.
This is the first time a fashion designer was called to sit on a jury at the festival.
He also designed the dress that Anggun wore as she represented France during the grand-finals of the Eurovision Song Contest 2012 held in Baku, Azerbaijan.
In 2012 he also participated in the Cali ExpoShow in Cali (Colombia), showing his extense collection of perfumes and all classic clothes.
Collections and labels
Gaultier at the 2011 Cannes Film Festival.
Active Labels Labels include Jean Paul Gaultier, Gaultier PARIS – couture collection – and former JEAN'S Paul Gaultier, Eyewear Jean Paul Gaultier and Jean Paul Gaultier Argent.
Besides his ready-to-wear collection, in 1988 Gaultier expanded his brand to include the label Junior Gaultier, a lower-priced line designed for the youth market with a heavy nautical influence that he began to carry throughout all of his collections.
In 1988, a Junior Gaultier outfit was selected by Jeff Banks as the Dress of the Year.
The Junior Gaultier label was replaced in 1994 with JPG by Gaultier, a unisex collection that followed the designer's idea of fluidity of the sexes.
Gaultier Jean's, a similar line consisting mainly of denim and more simply styled garments with a heavy street influence, followed in 1992, which was then replaced with Jean's Paul Gaultier from 2004 to 2008.
Junior Gaultier's name was reused in 2009 for the launching of the child's wear, to be completed with a Baby Line in 2011.
What brought Gaultier immense success was the advent of his haute couture line in 1997.
Through this collection, he was able to freely express the scope and range of his aesthetic, drawing inspiration from radically divergent cultures, from imperial India to Hasidic Judaism.
As a result of this success, Hermès hired Gaultier as creative director from 2003 to 2010.
Hermes took a 30% stake in Jean Paul Gaultier in 2003 and later increased their stake to 45%.
Gaultier's Spring 2009 couture was influenced by the visual style of singer Klaus Nomi and he used Nomi's recording of Cold Song in his runway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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