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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13, 2012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 )




maison martin margiela official

수수께끼 같은 패션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1957.4.29~)는 기본적인 것만 남은 기능주의 미학과 함께 ‘해체주의’라는 새로운 패션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패션의 관습에 도전하였다.
의복 구성의 형식을 파괴한 이 개념적 디자이너는 노출된 솔기, 마무리하지 않은 단 처리, 구조의 해체와 재활용 등을 통해 익숙한 의복을 입는 새로운 착장 방식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의복의 생산과정을 노출함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발명한 위대한 혁명가로 남아있다.

1980년대 후반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들의 출현은 패션계에 예상치 못한 변화의 흐름을 가져왔고,
당시에 배출된 다수의 신진 디자이너들의 독창적인 스타일의 최상위에는 지금까지도 탁월한 해체주의자로 분류되는 마틴 마르지엘라가 있다.

마르지엘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규정된 이론을 의문시하는 일련의 분석들로 패션계 내부와 외부 모두에 활기를 불러올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의복 자체를 고려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생산되는 시스템까지도 고려했다는 점에서 해체주의적이었다.

마르지엘라 작업의 핵심은 주로 패션에 숨겨진 것, 즉 의복 아이템이 구성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형(形), 소재, 구조, 테크닉과 같은 의복 아이템의 기저를 이루는 여러 측면들에 대한 탐구는, 생산과정을 노출하거나 전통적인 생산 배후에 숨겨진 기술들을 드러내게 해주었다.

그 예로 1997년 마르지엘라는 낡은 테일러링 인체모형(dummy)를 토대로 2회의 연속적인 세미 쿠튀르(semi-couture) 컬렉션을 열었는데,
여기에서 가봉작업의 생산 단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요소들이 재킷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의복은 솔기들을 노출하고, 안감이 드러나며, 느슨한 실들이 촉수처럼 늘어지는 등 소재의 표면재질이 주의를 끌면서 작업과정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틴 마르지엘라는 패션의 가장 기초적 요소들까지 파괴하였고 이것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하였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해체의 과정은 많은 별개의 단계들을 거치면서 발생한다.
첫째로 옷의 내부가 외부로 향한다.
겉으로 빈틈없이 완벽해 보이는 생산의 비밀인 헴라인(hemline), 다트(darts), 스티치(stitiches), 테일러 마킹(tailor markings) 등이 표면으로 나타나며,
지퍼(zips)나 스터드(studs) 같은 감춰진 기능적 액세서리들이 강조된다.
둘째로 의복은 완성된 상태로 보이지 않으며 디테일들에서조차 생산과정의 각 단계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는 패션의 두 가지 구성적 요소들, 즉 완벽하게 잘 드러나지 않았던 수공예 기술과 제품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강조되고, 완성된 제품을 보여주는 눈부신 순간에도  생산과정에 나타난 노동의 흔적들은 말소되지 않고 그대로 노출된다.

마르지엘라는 항상 가장 일상적인 종류의 의복들을 취해서 이들을 입는 새로운 방식들을 보여줌으로써 시즌을 앞서 갔으며,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끊임없는 기존의 작품들을 재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컬렉션에 연속성을 부여하였다.

주로, 벼룩시장이나 스트리트 스타일로부터 영감을 가져오는 마르지엘라는 때때로 일상적인 의복의 형태와 소재를 혼합하고 변화시켜 패션으로 전환시키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익숙한 아이템들을 입는 새로운 방식들을 보여줌으로써 패션계의 관습적인 사고에 도전했다.
그 예로 1991년 여름 컬렉션에서는 1950년대 중고 연회가운들(ball gowns)이 회색으로 염색되어 조끼(waistcoat)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낡은 진과 데님 재킷들은 재작업을 거쳐 롱 코트로 변신했다.
1993년 가을 컬렉션에서는 벼룩 시장에서 가져온 4벌의 블랙 드레스들이 한꺼번에 봉제된 드레스와 19세기 수도사 코트로 디자인되었다.
또한 재활용된 소재와 낡은 액세서리들은 놀랍도록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탄생 되었다.
1988년에 겨울 컬렉션에서는 깨진 접시 조각들이 셔츠가 되었고, 비닐 쇼핑백들이 재단되어 티셔츠가 되었으며, 1991년에는 낡은 군용 양말을 거친 스티치들로 엮어 만든 스웨터를 발표했다.
1994년에는 인형 의상을 비율을 고려하지 않고 인체의 차원으로 확장하였고, 1996년에는 투명하고 가벼운 인조실크에 두꺼운 겨울코트 사진을 프린트 해 피부에 절묘한 느낌을 부여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가 어떤 것도 폐기하지 말아야 하며 정말 좋은 것은 항상 훌륭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디자인이 패션 역사의 산물임을 인정함으로써 개별 창조자로서의 디자이너의 개념을 약화시켰다.

마르지엘라는 현대 패션 시스템의 압력에 동요하지 않고 트렌드에 의해 규정되는 옷 입기 방식에 저항하면서, 여러 시즌에 걸쳐 자신의 컨셉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반복하였다.
경제 시스템이 디자이너들에게 부과하는 생산의 리듬을 거부하는 것처럼,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컬렉션들은 트렌드나 시즌에 구속되지 않았다.
타비 부츠(tabi boots: 발굽 형태로 일본의 전통식 신발에서 영감을 받은 구두)는 비록 약간의 수정은 있을지라도 매 시즌 다시 등장했으며,
특히 ‘성공 아이템,’ 즉 이전 컬렉션들에서 인기있었던 의상들은 자주 반복되었다.
이는 다양한 마틴 마르지엘라 라인의 발전으로 이어졌는데, 이들 각각은 내용, 작업방법, 기술의 차이에 따라 다른 숫자들을 부여 받았다.
하우스의 컬렉션 전체는 0부터 22까지의 숫자 체계와 동일시되는데, 이로부터 전 라인들은 0부터 23까지의 숫자가 프린트된 라벨에 관련 숫자들을 부여받았다.
이처럼 마르지엘라는 이미지를 대신하여 마치 색인과도 같은 착용기호들을 제시하였다.

그의 컬렉션에 자주 등장하는 화이트 베일은 착용자를 익명으로 만들어 옷을 입은 모델을 강조하기 보다는 일반대중을 위한 의복을 제안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그는 패션의 역사로 돌아가 익명의 조용한 전복을 꾀하는데, 여기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의 신중함이다.
일상적 의복, 익명의 의복에 잠들어 있는 스타일을 향한 진정한 야망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변덕을 피하고 결코 패션의 희생자가 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들을 알려준다.
일상적인 스웨터, 재킷, 드레스들은 마르지엘라와 함께 다시금 열망의 테마(theme)가 되며 아이디어의 표명이 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풍기는 것은 단순함의 미학이다.
따라서 마르지엘라는 개념화의 초기단계로부터 클래식을 업데이트하고 기록ㆍ보관하며, 이런 식으로 그는 변화보다는 오히려 영속성에 기반한 패션이라는 역설을 통해 스타일을 발명하고 이전 컨셉을 부활시킨다.

해체주의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후기 구조주의 사상의 하나로, 그 근간은 프랑스의 비평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비평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패션에서 ‘해체’라는 용어는 1989년 <디테일즈(Details)>라는 잡지에서 빌 커닝햄(Bill Cunningham)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으며, 1989년 10월 마틴 마르지엘라의 1990년 봄/여름 파리 컬렉션에서부터 해체주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989년 그의 최초의 컬렉션은 독특하게 좁은 어깨를 특징으로 하였는데, 마르지엘라는 이를 ‘시가렛 숄더(cigarette shoulder)’라고 불렀다.
이것은 1980년대 파워드레싱(power dressing)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한 반항의 표명이었으며,
컬렉션은 플라스틱 드레스, 종이반죽 탑, 소매가 찢긴 재킷, 안감소재로 만들어진 스커트, 오버사이즈의 남성용 바지 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실험적인 역작으로 센세이션(sensation)을 불러 일으켰다.

마르지엘라의 해체주의 패션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이론 중, 차연(Différance: 자크 데리다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비평 용어), 상호텍스트성, 불확정성, Dis, De의 탈현상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패션에서의 차연은 과거-현재-미래의 복식양식을 결합시키거나 의복의 기존 개념을 변화시키면서 나타나는데,
마틴 마르지엘라는 엘레강스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미적 가치로 보았던 종래의 디자인에 반하여 솔기나 헴라인 등이 해체된 형태와 조잡하고 지저분하게까지 보이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1996년 여름 컬렉션에서 그는 의복 사진들, 니트 제품들, 시퀸으로 된 이브닝 웨어, 다양한 소재들을 가벼운 천에 사실적으로 프린트하여 착시효과(trompe l’oeil effect)를 줌으로써,
과거에 만들어진 디자인에 프린트 과정을 거쳐 새로운 디자인을 탄생시켰다.
1997년 로테르담(Rotterdam)의 보어만스 반 뵈닝헌 박물관(Boijmans van Beuningen Museum)에서 열렸던 마르지엘라의 단독 전시회는 미생물학자와의 협업으로 꾸며졌다.
그는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18개의 컬렉션들을 흰색과 회색 계열로 재염색한 뒤 곰팡이와 효모균을 부착시켜 배양한 후 옷의 변화를 보여주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또한, 그는 옷의 솔기를 고의적으로 뜯거나 구멍을 내 마치 누더기 같은 느낌의 옷을 창조함으로써 미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었다.

패션에서의 상호텍스트성은 성 역할에 따른 고정관념, 아이템 또는 TPO에 적합한 착장방법, 소재의 용도 등을 해체한 디자인으로 나타난다.
마르지엘라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를 결합시키고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을 하나의 스타일 속에 넣거나, 좌우 비대칭 혹은 안팎이 무너지는 디자인 속에 성격이 다른 소재들을 사용하여 상호텍스트성을 드러낸다.
1997년 가봉용 인체모형을 이용한 컬렉션에서는 의복의 생산과정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어깨선을 혼합시키고 소매를 제거하거나 어깨패드가 외부에 드러난 재킷 등을 선보였다.

독창적인 조형감각과 함께 레이어링 기법이나 착장방법에서의 변화는 의미의 불확정성을 나타낸다.
1997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봉제하지 않은 천을 자유롭게 두르거나 휘감는 등의 새로운 착장법을 제시했고,
2004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스커트를 착용하는 대신 상의 앞부분에 고정시키는 혁신적인 착장방법과 함께 재킷의 소매를 안으로 집어넣어 소매의 기능성을 해체시키기도 했다.
2006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원단 롤(roll)을 스커트의 한 부분으로 남겨두어 옷의 구조적 제약을 무너뜨렸으며,
1999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옷 대신 사이즈만 제시한 사진을 들고 무대를 걸어나오는 모델들로 착장방법의 해체를 제시하였다.

패션에서의 해체주의는 탈중심, 탈구성, 위치전환, 비균형적, 비구조적 표현기법을 통한 Dis, De 탈현상으로도 나타난다.
형에 대한 연구는 마르지엘라의 1998년 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일련의 ‘납작한 의복’ 시리즈에서 잘 나타난다.
이 의복은 착용되지 않을 때에는 종이 패턴의 2차원적 구조를 유지하며, 진동은 측면이 아닌 정면에서 절개되고, 입혀질 때에만 3차원적인 형태를 보인다.
1998년 봄 컬렉션에서는 비닐 쇼핑 백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편평한 의복으로 가득한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이는 옷걸이에 걸린 의복들을 나르는 화이트 코트를 입은 남성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또한 1999년 여름 컬렉션에서는 인체 사이즈로 확장된 인형 옷 시리즈를 재생산하였는데, 이것은 거대한 단추와 지퍼가 달린 불균형한 모습이었다.
‘Size 74’라고 불렸던 2000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터무니없이 큰 사이즈의 코트, 셔츠, 란제리, 남자 와이셔츠가 선보여졌다.
이는 관습적으로 인식되는 사이즈나 평균에 대한 개념을 의문시하고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르지엘라는 착용자가 디자인과 상호작용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해서 나타난 의복의 최종 형태는 착용자의 몸에 의해 결정되었다.
만일 패션이 여성의 몸의 관능성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물신숭배(Fetishism) 과정이라면, 마르지엘라의 작업은 이러한 패션의 비밀을 밝히고 완벽한 위장을 노출하며 패션상품, 즉 물신화된 여성의 몸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마르지엘라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마네킹(mannequin: 디자이너 스튜디오에 있는 천이나 목재 인형)으로, 그의 패션의 해체는 바로 이 마네킹과 함께 시작된다.
마네킹은 여성의 형의 표준화를 주도했으며, 그리스 조각에서부터 고전적으로 전승된 클래식한 비례의 규준을 따르는 것이었다.
마르지엘라는 마네킹을 패션쇼 무대로 끌어와 획일화된 여성의 이상적 몸이 자연의 육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예술로 생산되는 방식임을 보여주었다.
의복의 내부가 외부가 되는 이 미완성된 조각들은 무생물의 인형과 같은 상에 대한 매혹을 노출한다.
패션 칼럼니스트 빈켄(Vinken, 2005)은 이를 포스트패션(postfashion)이라 칭하는데, 이 패션에서는 안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열린 그리고 역전된 의복이 나타난다.
마르지엘라의 의복은 패션의 이러한 핵심을 외부로 전환시킴으로써 더 이상 생명없는 이상의 영원한 완벽함에 활기를 불어넣지 않는다.

더 나아가 마르지엘라는 우리를‘타자’로 감싸는데, 이는 더 이상 규준화된 불멸의 이상이 아닌 유기적으로 살아있는 몸이 남긴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의 ‘누더기 옷(rag clothes)’은 죽음으로 향하는 인생에서 타인의 몸들이 남겨져 깊은 인상을 주는 흔적을 보여준다.
마르지엘라에게 생산과정의 외부로의 전환은 기능주의의 해체, 즉 기능없는 기능을 보여주며 이는 그의 작업에서 또 하나의 장식이 됨과 동시에 시간에 대한 외부로의 전환이 된다.
이처럼 시간은 마르지엘라의 작업에 고착되어 있다. 그의 의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시간의 흔적을 전달하며 그 자체가 시간의 기호가 된다.
즉, 첫째는 생산과정의 시간으로서, 그리고 둘째는 사용과정 중에 소재에 남겨진 흔적들로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재활용은 도덕적이거나 정치적, 환경적인 문제가 아니며, 전적으로 미적인 전략으로 독특한 예술작품으로서의 권한을 획득한다.

앤트워프 왕립 미술학교(Antwerp’s Royal Academy of Fine Arts)의 멤버이자 해체주의 패션의 창립자, 마르지엘라는 환원(reduction)의 대가이다.
1980년대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개성과 이미지를 홍보했던 것과는 달리, 마르지엘라는 디자이너 개인 숭배를 회피하며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또한 자신이 디자인한 작품에도 어떠한 표식 없이 흰색의 빈 라벨만을 부착한다.
이와 같은 그의 작업 방식은 브랜드 이미지와 디자이너의 이름이 주요 마케팅 전략을 이루는 패션의 맥락에서 두 개의 부재, 즉, 얼굴과 이름이 없이 텅 빈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마케팅 전략으로 오인되어, 마틴 마르지엘라는 소수의 특권층을 완전히 사로잡는 디자이너로 자리매김 하였다.

마틴 마르지엘라는 1959년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림부르흐Limburg) 지역에서 가발과 향수업을 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앤트워프 식스’ 중의 하나로 자주 분류되지만, 실제로 그들보다 1년 일찍 왕립미술학교를 졸업해서 파리의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 밑에서 3년간 도제생활을 했다.
앤트워프 식스의 패션 디자인에 대한 접근은 고도의 진지함이 결합된 뛰어난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마르지엘라는 1980년대 중반 그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패션의 인습타파주의자, 장 폴 고티에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창조성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고티에를 떠나 1988년 그의 친구이자 앤트워프에 부티크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이 마이렌스(Jenny Meirens)와 함께 파리에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를 설립하였다.

마르지엘라는 대중 앞에 나타나는 어떠한 인터뷰나 홍보도 회피하였다.
이러한 자진적 은둔을 통해 그는 자신을 쇼맨(showman)의 역할에 한정짓기를 거부했으며, 사적이든 공적이든 사진이나 초상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따라서 마르지엘라 자신은 늘 그늘에 가려졌고 대신에 상승했던 것은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라는 하나의 집합적 서명이었다.
1990년대 초에 이르자 마르지엘라는 이미 패션계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인터뷰는커녕 패션 미디어에도 마지못해 응함으로써 그의 인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 자신보다는 그의 의복을 바라봐주기를 원했으며, 의복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특성은 그가 모든 인터뷰를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 개인이 아닌 메종 마르지엘라라는 팀 단위로,
그것도 주로 팩스나 이메일을 통해 수행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비주의 디자이너 마르지엘라 자신처럼, 그의 컬렉션의 모델들은 자주 눈이나 얼굴을 가리고 등장한다.
2009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스타킹으로 모델의 얼굴을 가리고 얼굴과 어깨에 가발을 씌움으로써 착용자를 익명으로 만들 뿐 아니라 착시현상까지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마르지엘라 컬렉션에 나타난 익명성은 판촉과 홍보의 대상으로서 모델을 이용하기보다는 일반 대중을 위한 의복을 제안함으로써 패션계의 관습에 전복을 가져왔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마르지엘라는 메종 마르지엘라 본사를 생토노레(Faubourg Saint-Honoré) 거리의 명성있는 지역으로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파리 북부 교외에 있는 전 철도 작업장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컬렉션들은 바르베(Barbès), 즉 주로 아프리카인과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파리의 가장 가난한 지역들 중의 하나에서, 텅 빈 지하철 통로에서, 버려진 주차장에서, 폐기된 철도역에서 개최되곤 했다.
또한 그의 디자인들은 종종 비전문가 모델들에게 입혀지기도 했는데, 이처럼 마르지엘라의 모델들은 패션산업의 판촉을 위한 장치가 아닌 사적인 사람들로 익명인 채 남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익명성은 머리 주변을 감싼 베일을 통해 보다 강조된다.

마르지엘라 의복의 가장 주목할 만한 디테일은 이름도 단어도 씌어있지 않은 다소 큰 모슬린(muslin: 평직으로 짠 무명) 조각의 화이트 라벨이었는데, 이것은 코너에 붙여진 4개의 화이트 스티치로 의복 바깥에 드러나 있다.
그는 호화로운 브랜드나 자기과시적인 로고의 서명보다는 화이트의 심플함을 선택함으로써 하나의 뚜렷한 문화를 제안한다.
이 라벨은 브랜드 정체성(BI)도 사이즈 표시도 제시하지 않고 오로지 화이트 스티치로만 주목을 끌었는데, 이는 현대 디자이너 시스템을 의문시하면서 상품 브랜드화 현상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와 같은 브랜드 제시에 대한 거부는 반작용을 낳아, 오히려 브랜드를 중시하는 특권소수층의 선택을 야기했다.
그리고 마르지엘라의 수수께끼 같은 페르소나는 점점 그만의 개성으로 인정되어 패션계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해체주의와 실험성은 1988년 오픈 이후 바로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사업의 발전은 다소 더디고 어렵게 나타났다.
그의 첫번째 스토어는 2000년이 되어서야 도쿄에 오픈했으며, 대부분의 스토어들은 내부자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찾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고 재정적 압력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2002년 회사는 이태리의 혁신적인 데님 브랜드, 디젤(Diesel)의 소유주 렌조 로서(Renzo Rosso)라는 호의적인 투자자를 만나게 된다.
이 거래는 메종 마르지엘라에 사업상 전환점을 가져와 2007년 이후 특히 일본을 중심으로 판매가 급등하였으며, 이후 마르지엘라는 향수와 주얼리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였다.
2008년 메종 마르지엘라 20주년을 즈음하여 마틴 마르지엘라가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곧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라는 제목의 앤트워프에서의 대형 회고전과 2009 봄/여름 컬렉션의 에너지로 대체되었고,
2009년 초 메종 마르지엘라는 홈 데코레이션(home decoration)과 호텔 디자인 분야에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수수께끼같은 마르지엘라의 특성도 불구하고 디자이너로서의 그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곳곳에서 관찰된다.
특히 데님 영역에서 스타일의 재활용과 해체가 확고한 기반을 확립했으며, 새로운 세대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니콜라스 게스키에르(Nicolas Ghesquiere)는 마르지엘라의 작업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끌어왔다.
그리고 21세기 지속가능성이라는 환경적 이슈와 빈티지(vintage) 패션의 발전을 살펴볼 때, 마틴 마르지엘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패션을 앞서가는 진정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한편 마르지엘라는 1997년 프랑스 최고의 럭셔리 하우스들 중의 하나인 에르메스(Hermès)의 수석 디자이너로 지명되었다.
에르메스의 회장 장 루이 뒤마(Jean-Louis Dumas)는 마르지엘라의 모델이자 여배우였던 그의 딸을 통해 마르지엘라를 알게 되었고, 그를 에르메스의 전통을 이어갈 만한 ‘명마를 위한 훌륭한 기수’라고 판단했다.
그는 에르메스에서 하우스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계속해서 그의 특징적인 테일러링을 발전시켰다.
특히 마르지엘라는 에르메스에서 가죽과 캐시미어의 절대적인 질과 우수성을 보증 받았다.
그에 의해 근본적이지 않은 것은 제거되었고, 모든 것은 진정한 명품의 핵심으로 환원되었으며, 작업의 완벽한 질과 마감이 주축을 이루었다.
2003년 마르지엘라는 에르메스를 떠났고, 2004년 한때 그의 멘토였던 장 폴 고티에가 이를 계승했다.

참고문헌
Baudot, F., [Fashion, the twentieth century], (Universe publishing, 1999); Debo, K. and Loppa, L., “Martin Margiela,” In V. Steele(ed), [Encyclopedia of Clothing and Fashion (Vol.2)], (Charles Scribners & Sons, 2004); English, B., [Fashion – The 50 most influential fashion designers of all time], (Barron’s, 2009); Polan, B. and Tredre, R., [The Great Fashion Designers], (Berg, 2009); Saillard, O., “Martin Margiela – Inventor of a style,” In I. Luna ed), [Maison Martin Margiela], (Rizzoli, 2009); Seeling, C., [Fashion: 150 Years Couturiers, Designers, and Labels], (Tandem Verlag GmbH -h.f.ullmann, 2010); Vinken, B., [Fashion Zeitgeist: Trends and Cycles in the Fashion System], (Berg, 2005); 이재정, 박신미, [패션, 문화를 말하다: 패션으로 20세기 문화 읽기], (예경, 2011); 장정임, 이연희, “Martin Margiela의 작품에 나타난 해체주의 패션,” 패션과 니트 4(1), 2006.

글 최경희 / 한성대학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의류직물학과에서 학사, 서울대학교 의류학과에서 석·박사, 런던예술대학교 London College of Fashion에서 석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대구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근무하였고, 현재 한성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Martin Margiela (born April 9, 1957 in Genk, Belgium) is a Belgian fashion designer.
He studied at Antwerp's Royal Academy of Fine Arts along with the legendary avantgarde fashion collective the Antwerp Six.

Life and work

After graduation in 1980 he worked as a freelance designer for five years.
Between 1985 and 1987 he worked for Jean Paul Gaultier, before showing his first collection under his own label in 1989.
Between 1997 to 2003 he became, despite his non-traditional design, the creative director of the Hermès women's line.
During the 1980s, the Japanese avantgardists, with Rei Kawakubo—creator of the label Comme des Garçons—had turned the fashion scene upside-down with their eccentric and ground-breaking designs.
Martin Margiela and the Antwerp Six would carry on the work, revolting against the luxurious fashion world with garments of oversized proportions such as long arms, and with linings, seams and hems on the outside.
The concept of deconstruction, also embraced by the aforementioned Rei Kawakubo, is important for the understanding of Martin Margiela's fashion statement.
Margiela famously redesigns by hand objects such as old wigs, canvases and silk scarves into couture garments.
Throughout his career, Martin Margiela has maintained an extremely low profile.
He has never had his picture taken and remains backstage after his shows.
All media contact is dealt with via fax. Maison Martin Margiela’s ultradiscreet trademark consists of a piece of cloth with the numbers 0-23.
The badge is attached to the inside with its four little white pick stitches, exposed to the outside on unlined garments.
For the 20'th anniversary the anonymous tag was replaced by a classic logotype.
Margiela's brand was acquired by the Diesel brand in 2002 and industry insiders quoted in the article suggested that Martin Margiela may desire to leave due to creative differences, or simply,
"... a desire to enjoy his life outside the insistent glare of the fashion world."
An article in New York Times dated October 1, 2008, gave many in the fashion world their first glimpse of Margiela's face, as well as breaking the news that he allegedly offered to hand the reins of his company over to Raf Simons, who appears to have declined the offer.
Haider Ackermann was later offered the position as creative director, but similarly turned it down.
In October, 2009, Margiela majority stakeholder Renzo Rosso finally made public:
"Martin has not been there for a long time. He is here but not here. We have a new fresh design team on board. We are focusing on young, realistic energy for the future; this is really Margiela for the year 2015."
A press release announced in December, that Margiela "has left the business. No replacement creative director will be appointed. Maison Martin Margiela will continue trading but the company declined to comment on the reasons for Margiela’s exit."

2 comments :

  1. 은퇴했는데...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디자인팀이 운영이라고 되어있지만
    demna gvasalia (https://www.facebook.com/demna) 가
    지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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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앗 감사합니다! 발췌 글이다 보니 시기에 안맞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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