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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9, 2012

김기덕





어느날 나쁜 남자의 깨진 유리를 보았고
어느날 섬의 낚시 바늘을 보았고
어느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호수를 보았다.

사람이 사고하지 않으면 상황에 휩쓸려 가게 되는 것처럼.

그는모든 소재에 사고를 투영하고, 그 위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곤 관객을 질질 끌고다녔다.


한 때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인신 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고, 한편에선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보여준 '새로움'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볼 만하네" 혹은 "조금 아쉽군"식의 미지근한 반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특히 그의 초기작들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었고 그는 한 동안 오해와 편견을 견뎌야 했다.

  

아버지, 공장, 군대, 기독교. 20대까지의 김기덕
아마도 김기덕 감독은, 최근 한 세대 동안 데뷔한 한국의 영화감독들 중 가장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장에서 일했고, 제대 후엔 파리로 가 3년 동안 거리의 화가로 살았던 그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영화학교에 다닌 적도 없었고 충무로에서 연출부 생활을 했던 적도 없으며, 단편영화 습작 기간을 거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비전형성’이 그의 영화를 낯설게 만들었고, 관객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을지도 모른다.

6.25 상이용사였던 아버지는 그에게 너무나 두렵고 절대 군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2003년에 나온 그에 대한 두툼한 연구서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에서 김기덕 감독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 아버지를 난 미워할 수도, 증오할 수도 없었다. 그도 피해자였으니까. <수취인불명>(01)의 지흠(김영민)과 그 아버지(명계남)가 바로 우리 부자의 자화상이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가족들을 먹여 살렸으며, 순종하는 척하면서 결국 아버지를 이겨 온” 분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그는 끊임없이 무엇을 만들고 공책에 그림을 그렸으며 직접 만든 권총을 지니고 다니는 아이였다. 그의 가족은 경상북도 봉화에서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를 온다. 큰아들의 교육을 위한 아버지의 결단이었다. 하지만 장남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차남에게 “기술 배워서 공장장이 되라. 그게 더 출세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김기덕 감독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장에 들어간다. 친구들은 학교에 다닐 때 노동의 세계에 입문한 10대 시절의 김기덕 감독. 그는 직접 기계를 조립했고 남들보다 서너 배의 생산성을 지녔던 숙련공이었으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공장장 자리에 올랐다.

20대가 되자, 그는 해병대에 입대해 5년 만에 하사관으로 제대한다. 이후 어느 시각장애인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한때는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종교적 고민을 오랫동안 했고, 이름도 없는 야간 학교지만 신학을 1년 정도 공부한 적이 있고,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멈춘 이유가 내 스스로의 인격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죄도 아니고 가장 인간의 기본적인 것인데, 저는 그것 때문에 신학을 관뒀어요.” 이탈리아의 평론가 안드레아 벨라비타는 <한국의 영화감독 7인을 말하다>에서, 김기덕 감독의 종교적 배경에 주목한다. “기독교와의 소통은 그의 지식과 정신적 성장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이것은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 힘든 인생의 경험이 정신적 차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중략) 김기덕은 기독교로부터 그 어떤 종교적 확신도 얻지 못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죄와 속죄의 변증법만큼은 흡수한 것처럼 보인다.”


거리의 화가였떤 파리의 3년. 시나리오 쓰며 악전고투하던 3년
억압적인 아버지와 법 없이도 사실 분인 어머니, 어린 나이에 뛰어든 현실적인 삶의 세계와 지독한 군대 생활, 그리고 종교와의 만남. 김기덕 감독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와 청년기는 꽤 드라마틱했다. 그는 엔지니어가 될 수도 있었고, 직업 군인이 될 수도 있었으며, 종교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90년,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그는 무작정 파리로 떠난다. 그것은 도피이자 새로운 출발이었으며,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의 힘겨움에 대한 발로였다.


그는 3년의 파리 생활을 생생한 이미지로 떠올린다. <키노>에서 펴낸 <감독사전>의 앙케트에서 “삶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순간”에 대한 질문에 그는 파리의 첫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나는 밤새 파리 시내를 헤매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닭을 사서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어스름한 아침, 흑인 청소부들이 거리를 청소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까지 잊을 수 없는 파리를 청소하는 흑인 청소부들은 그 후 내가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고 모델이었다. 그리고 아랍의 집시들도 나의 그림의 모델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처절한 삶에서 나의 모습을 거울처럼 발견했기에 어떤 연대감이 느껴진 것 같다.” 당시 그는 주로 인물화를 많이 그렸고, 그 주인공은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었다. 20여 점의 그림을 배낭에 넣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며 도시의 광장에서 전시회를 벌이기도 했다. 3년 가까이 되는 이 기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었고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삶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도 생겼다.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시간들과 그림을 통해 사색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영화감독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영화의 시작은 그림이다.”



1993년 봄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제대로 짐을 꾸려 유럽으로 완전히 나갈 생각이었다. 이때 우연히 보게 된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 광고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기계나 그림과 달리, ‘글’은 그에게 익숙한 대상이 아니었다. 군대 시절, <호국 문예>에 ‘아버지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1,000매짜리 논픽션을 출품한 적은 있었지만, 시나리오는 달랐다. 그는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힘겹게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낙선이었다. 오기가 생긴 그는 출국을 미루고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교육원의 기초반에 등록했다.

기본적인 영화용어는 물론 맞춤법에도 서툴렀던 그는, 악전고투 끝에 6개월의 교육 기간 중에 세 편의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아직은 설익은 상태였다. 그는 6개월의 전문반 과정에 등록했고, 수료식에서 당당히 대상을 수상한다. <화가와 사형수>라는, 한국계 혼혈의 이야기였다. 장학생으로 연구반에 등록한 그는 두 달마다 한 편씩, 엄청난 속도로 시나리오를 썼고 매 공모전마다 출품했다. <검은 해병> <배> <이중노출> 등의 습작을 거쳐 1995년에 <무단횡단>이라는 시나리오가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안타깝게 영화화되진 못했지만, <무단횡단>은 당시 많은 영화사에서 군침을 흘리던 시나리오. 김기덕 감독은 충무로에 입성해 영화사에서 전속 작가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의 충무로는 아직 열악한 상태였다. 그는 영화사를 나와 자신의 데뷔작이 될 <악어>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하지만 논쟁적인 발견
1996년은 한국영화계가 두 명의 감독을 발견한 해다. 먼저 홍상수가 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96)은 한국영화에 ‘일상성’이라는 화두를 가져왔고 홍상수 감독은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악어>가 왔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후 개봉했던, 제작비 3억5천만 원의 영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평단의 반응도 그저 그랬지만, 몇 명의 평자들과 소수의 관객들은 이 영화의 지지자가 되었다.

하지만 <악어>는, 이후 그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03) 전까지 6~7년 가까이 치러야 했던 논쟁과 오해의 시작이었다. 정성일의 “어설프지만 주목할 만한 영화, 모든 걸 뛰어넘으려는 영화” 같은 호의적 평가도 있었지만, ‘아마추어 영화’나 ‘강간 영화’ 같은 혹평이 줄을 이었다. 이후에도 저예산 영화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만듦새의 허술함이나, 폭력적인 성 묘사에 대한 비난은 한동안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된다. 이어지는 <야생동물 보호구역>(97) <파란 대문>(98)도, 그의 영화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조금 늘어났을 뿐 비슷한 반응이었다. 당시 <씨네21>의 ‘20자 평’은 그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색적 소재의 소화불량 상태”(악어) “한국영화가 세상의 변경이라면 그 변두리 중에서도 한참인 어느 구석에서 만들어진 기막힌 영화”(야생동물 보호구역) “너도 매춘부, 나도 매춘부? 수상쩍은 매춘부 자매애론”(파란 대문)

특히 <야생동물 보호구역> 때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무관심과 혹평에 저항해 일간지 문화부와 영화 관련 저널에 팩스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영화월간지 <스크린>은 김기덕 감독이 보낸 편지의 상당 부분을 책에 실었다. “스스로 수준을 낮춘 관객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어 감독이 되었고, 이미지 영화, 새로운 미장센, 풍부한 시퀀스로 박진감 넘치는 장면 변화, 자칫 어설퍼 보일지도 모르는 생략과 강조, 새로운 소재와 장르 개척 등,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중략) 저는 약속합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관객이 10만 명을 넘지 않으면, 어쩌면 저는 더 이상 영화감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관객이 없는 영화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제작자에게 제작비 회수를 책임지지 못하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이런 영화들을 무시하고 유명 배우가 나오는 코미디나 멜로에 박수를 치는 관객들을 위해 제가 계속 창작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의 이러한 행동은,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충무로의 비주류로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콤플렉스와 함께,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뒤섞인 것이었다. 하지만 <파란 대문>부터 상황은 조금씩 바뀐다.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인 강한섭 교수는 ‘1998년 최고의 영화’로 꼽으며 “성을 이 정도로 깊고 넓게 표현한 영화는 드물다”고 극찬했고,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한국의 비디오 시장에서도 꽤 성공을 거두었다.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의 직접 쓴 글에서 그는 “<파란 대문>은 나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고, 돈은 한 푼도 벌지 못했지만 뭔가를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저예산 영화 시스템의 가능성. 전인미답의 반추상적 영화
김기덕 감독이 세기말에서 세기초로 넘어가는 한국영화에 던진 중요한 화두는 ‘저예산 영화의 가능성’이었다. 10억 원 이하의 제작비 안에서 만들어지는 그의 영화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환상을 좇고 있던 당대의 한국영화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작품들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 시장에서의 냉대로 인해 데뷔시절부터 국제영화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 결과 해외 시장을 통해 취약한 국내 시장을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외국 자본에 의해 미리 제작비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의 페르소나로 일컬어지는 조재현은 김기덕 감독이 “남들이 다 여기가 한계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돌파”한다고 말하며, <파란 대문> <수취인불명> 등의 카메라를 잡았던 노장 촬영감독 서정민은 “신인 감독이었지만 두려움이 없고 대담했다.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밀고 나가는 뚝심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이런 평가들은 본능에 가까운 엄청난 추진력으로 ‘다산성의 작가’가 된 김기덕 감독의 저돌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산업적 측면의 평가와 아울러,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캐릭터와 미학이 성취하고 있는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악어> 때부터 지지자였던 당시 <씨네21>의 남동철 기자는 김기덕 감독 영화의 새로움을 이렇게 평가한다. “주류 영화가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주인공을 선호하는 데 비해 김기덕 감독은 모두가 미워하는 인물을 내세운다. 여기서 선인 대 악인 식의 이분법은 자연스럽게 무너진다. (중략) 김기덕 영화의 독창성은 쓰레기 같은 인생에 영혼을 불어넣는 데서 시작된다. (중략) 김기덕 영화의 낯선 이미지는 구태의연한 화면 짜기에 대한 의미 있는 반항이다.”

영화를 ‘배우지 않은’ 김기덕 감독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타인들이 보지 못하는 삶의 단면을 포착했고 그것을 영화적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의 상상력은 독보적이었다. <파란 대문>의 프로듀서였으며 이후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02) <해안선>(02)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을 제작했던 이승재 대표는 “김기덕 영화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뭉뚱그린다면 휴머니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김기덕의 스타일에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반추상 영화’라고 표현하는 그의 미학은, 그의 이미지가 지닌 파워를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이것은 현실적인 언어로 찍힌 이미지에 회화적이며 심리적인 표현을 더하는 것으로, 감독은 ‘심리적 반추성’ ‘역설적 반추상’ ‘상황적 반추상’ 등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악어>의 물 속은 심리적 반추상이며, <파란 대문>에서 여름에 눈이 오는 설정은 상황적이며 역설적인 반추상이다. <섬>(00)의 자해 장면이나, 그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에곤 실레의 그림도 반추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분명 한국영화의 문법 속에선 낯설다 못해 이상하고 엽기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김기덕 감독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서정성과, 판타지와, 리얼리티와, 원초적인 그 무엇을 드러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김기덕. 불신과 오해를 벗다
김기덕 감독은 계속 전진했다. 군소 영화사와 작업하던 그는 <섬>에서 명필름과 손잡게 되었고 베니스영화제와 선댄스영화제에서 수상한다. <실제상황>(00)에선 400분 동안 촬영해 84분의 영화를 만들었다. <수취인불명>은 자전적 이야기였고, <해안선>은 그의 군대 생활이 반영된 작품이었다. <나쁜 남자>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끊임없이 논쟁에 휘말렸고, <해안선> 즈음엔 인터뷰를 거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외 영화제에서 그의 지명도는 점점 높아졌다. 그렇지만 그의 아홉 번째 영화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김기덕의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강성률은 “김기덕 영화의 변모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며 “하층민의 야생적 삶이 생생한 날것의 이미지로 녹아있는 시기와,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철학적이고 종교적으로 변해간 이후의 영화” 사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있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한국의 영화상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처음으로 평가한 계기인데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이 작품상을 수여했다.

이후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고질적이었던 ‘여성 비하’의 혐의를 벗는다(그의 여성 캐릭터들은 상처 받은 남성을 조용히 위로하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그를 비난했던 몇몇 평론가들의 회심(?)도 이때 이루어졌다. 2004년엔 <사마리아>가 베를린영화제에서, <빈 집>이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면서 그의 영화는 자국 시장에서의 흥행보다는 국제 무대의 작가영화로 완전히 옮겨갔다. <아름답다>(08)의 전재홍 감독, <영화는 영화다>(08)의 장훈 감독 등, 그의 조감독들이 데뷔하면서 그는 ‘제작자’로서 자막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05) <시간>(06) <>(07) <비몽>(08) 등, ‘김기덕 영화’임이 분명한 작품들이 매년 쉬지 않고 관객과 만났지만, 이젠 더 이상 그의 영화를 놓고 과거같은 소란과 싸움은 없다. 그의 영화에서 더 이상 ‘강렬함’을 찾기 힘들다며 불만을 이야기하는 관객들도 있다. 하지만 계절이 변하듯, 30대 중반에 데뷔해 어느새 지천명의 나이에 다다른 영화감독의 작품 세계가 여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 이후, 그는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 듯하다. 인터뷰 때마다 항상 두세 편의 차기작 계획을 이야기하곤 했던 그는, 작년 <비몽> 관련 인터뷰에선 차기작에 대해 “아직 없다”고 말했다. 12년 동안 15편의 영화를 만든 후 현재 농촌에 칩거중인 김기덕 감독. 하지만 이 ‘다산성의 영화감독’이 오래 쉴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뭔가 안에 고이길 기다리는 듯하다.



김형석 / 영화 월간지 <스크린> 전 편집장
고려대 서양사학과와 동국대 영화과 대학원을 마쳤다. 시네마테크 문화학교서울<현 서울시네마테크>에서 영화 일을 시작했으며 2000년 <스크린>에 입사한 후 부터 영화 저널리스트로서 살고 있다.

출처http://navercast.naver.com/korean/movieperson/639



피에타.

수취인 불명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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