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150 Years of Couturiers, Designers, Labels](2010)의 저자 샤를로트 실링(Charlotte Seeling)은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1960.11.28~)에 대한 글의 서두에서 ‘천국의 화려한 새, 패션쇼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디자이너’라 언급한 바 있다.
‘패션계의 악동’, ‘로맨틱의 영웅’ ‘패션 천재’라는 수식어로도 유명한 갈리아노는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대학(Central S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을 수석 졸업하고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상’을 3차례나 수상했다.
1996년 최고의 럭셔리 패션 하우스인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에 오른 그는 현대 파리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수장이 된 최초의 영국인 디자이너였다.
그는 과감하고 정열적인 디자인과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로 디오르 왕국을 부활시키며 세계의 패션 트렌드를 주도한 패션계의 혁명가였다.
런던에서 파리로, 한계를 넘어 중심에 서다
1960년, 스페인 지브롤터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후안 카를로스 안토니오 갈리아노(Juan Carlos Antonio Galliano)이다.
배관공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6세 때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런던 남부의 다문화적 도시에서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인들과 어울려 자라며 문화적 풍부함을 축적하였다.
갈리아노는 호기심이 강한 성격으로,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대학(Central S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에서 패션을 공부하면서 영화, 조각, 그래픽 등 다른 분야와의 교류를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통찰력과 창의성을 발전시켰다.
학창시절 그는 이른바 ‘리서치의 달인’으로, 미술관과 연극무대, 도서관 등을 찾아다니며 밤낮으로 공부하였고, 국립극장에서 파트 타임으로 무대의상을 담당하며 그만의 감각을 키워갔다.
1984년, 그는 세인트 마틴의 졸업 패션쇼에서 프랑스 대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믿을 수 없는(Les Incroyables)’ 이라는 제목의 컬렉션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
8벌의 유니섹스 룩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들은 런던 최고의 부티크 '브라운(Brown)'에 모두 팔렸고, 그는 미디어와 업계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갈리아노는 곧바로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였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런던 컬렉션에 참여하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갈리아노의 런던 컬렉션 시기는 특유의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적인 경향과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자유로운 창작법을 시도하였던 시기로 평가되는데, 상업적인 면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몇 년 지나지 않아, 패션계의 높은 기대에 대한 개인적인 부담과 압박감, 재정적인 문제들이 가중되면서 갈리아노의 레이블은 파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1987년에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로 선정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몇 년간 지지부진한 상태로 활동을 이어가던 갈리아노는 좀 더 넓고,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의 활동을 계획하며 파리로의 진출을 시도한다.
파리에서 첫 쇼를 개최한 것은 1990년이었는데, 그에게는 재정적 후원자가 없는 상태였다.
후원을 약속했던 몇몇 후원자들조차 갈리아노의 화려한 쇼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흐지부지한 관계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갈리아노는 1994년,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상'을 두 번째로 수상하였는데, 당시 그는 브랜드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1992/1993 가을/겨울 컬렉션은 발표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평단의 호평과 촉망받는 커리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까지 내려가게 되면서 그는 한계에 부딪혔고, 파리에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꿈도 좌절되는 듯 하였다.
바로 그 때 그에게 돌파구가 되어준 사람은 미국판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Anna Wintour)였다.
그녀는 갈리아노의 ’1993 봄/여름 컬렉션을 본 후 그를 지지하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 후원의 물고가 트이면서 갈리아노는 재도약하게 된다.
1995년, 그는 LVMH(Louis Vuitton & Moët Hennessy)의 수장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에게 스카우트되며 지방시(Givenchy)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지방시에서 한번의 오트 쿠튀르와 두 번의 기성복 컬렉션을 마친 후, 그는 같은 그룹 소유의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갈리아노의 디오르 입성은 패션 중심지 파리에서 영국인의 이름으로 이룩한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후 갈리아노는 그만의 천재성을 발휘하며 디오르의 부활을 주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와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오트 쿠튀르와 기성복을 넘나들면서 해마다 12번이 넘는 컬렉션을 개최하였으며, ‘패션계의 악동’이자 ‘천재’로서 언제나 스타일 혁신의 선봉에 있어왔다.
젊은 디오르(Dior), 관능적 낭만의 회귀를 불러오다
갈리아노는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된 후 패션계에 로맨스(낭만)의 회귀를 불러왔다.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여성을 가장 여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엘레강스한 면을 부각시켰다면, 갈리아노는 좀 더 대담하게, 페티시즘의 극단적인 형태를 포함하는 여성의 관능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갈리아노는 그만의 창조성을 영민하게 발휘하며, 아방가르드와 파격, 상업적인 면을 적절히 결합함으로써 디오르의 이미지를 보다 젊게 변화시켰고 기업의 매출을 4배로 신장시켰다.
갈리아노는 1947년의 뉴 룩과 1950년대의 페미닌한 수트 등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추구해 온 여성스럽고 우아한 하이패션의 이미지를 보다 젊은 여성으로 대체하였고, 다양한 문화적 요소 및 스트리트 패션에서 얻은 영감을 더하여 로맨틱하면서도 젊고, 보다 캐주얼한 디자인을 제안함으로써 디오르가 가진 전통성을 성공적으로 현대화하였다.
그는 과거 여성들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기, 벨 에포크 시대, 1930년대와 1950년대의 여성성 등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을 많이 보여주었다.
갈리아노의 전기를 집필한 콜린 맥도웰(Colin McDowell)은 그를 ‘로맨틱 리얼리스트의 혁명가’라고 칭하며 그가 창조한 판타지적 로맨티시즘에 찬사를 보냈다.
갈리아노가 표현하고자 했던 관능적 낭만은 디오르 하우스의 축적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현대적 트렌드를 반영하는 란제리 룩으로 종종 표출되었으며, 이를 가장 잘 승화시킨 대표적인 아이템으로는 속옷을 겉옷화한 슬립 드레스(slip dress)를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디자이너 마들렌 비오네(Madeleine Vionnet)를 존경하여 그의 디자인에 바이어스 재단을 많이 활용하였고, 아제딘 알라이아(Azzedin Alaia)를 좋아하여 투명하게 비치는 소재, 밝고 화려한 색과 주름장식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관능적 낭만에 더욱 다가갔다.
특히 갈리아노는 컬렉션을 통해 비오네의 바이어스 재단을 부활시키며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소화해 낸 바이어스 컷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갈리아노는 바이어스 재단에 대해 “그것은 매우 빠르면서도 유연한, 여성의 몸에 대한 깊은 존경을 보여주는 관능적인 재단방식이다.
그것은 마치 미끌미끌한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 패션이 나아갈 유일한 길은 구성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라며 강한 자신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갈리아노에 의해 바이어스 재단은 여성의 몸에 꼭 맞는 옷을 만드는 장치가 되었고, 보다 관능적이며 낭만적인 실루엣을 완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의복의 재단과 구성 기술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와 창조성은 환상과 과잉, 불손함 등 그의 패션에 대한 논란들을 잠재울 만큼 견고한 것이었다.
비평가들은 그의 옷에 대하여 현실세계와는 거의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의상(costume)’일 뿐이며, 소비자나 바이어들보다는 패션 에디터들이 좋아할만한 매우 복잡하고 입기 어려운 의상을 만들어낸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존 갈리아노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걸쳐 실험적이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의상을 만들어내었던 디자이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역사주의와 이국적 취향, 다양한 스타일이 융합된 퓨전 패션을 창조하다
갈리아노는 어떠한 문화에도 개방되어 있는 자유주의자이자 실험적 창조성을 통해 패션계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 온 장본인이었다.
그는 동ㆍ서양 문화의 과감한 융합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컬러의 조화, 절제보다는 과감함, 뉴 룩의 재해석을 토대로 한 새롭고 젊은 뉴 룩의 창조, 섬세한 무대 연출과 파격적인 메이크업, 의복 패턴의 해체와 재구성, 과장된 실루엣 등을 통해 의복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매우 낭만적이며 종종 충격적인 스타일로 패션의 경계를 넘나든 갈리아노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적 자료를 탐구하고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믹스하여 아름답고 빛나는 의상을 창조하였다.
그는 “창의성은 국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행은 가장 강력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며, 나는 다른 문화를 보고 이해하는 것이 무척 좋다.“고 말하며 역사주의와 이국적 취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갈리아노는 동서양 문화의 과감한 융합과 화려한 컬러의 조화, 과장된 실루엣과 파격적인 메이크업으로 역사주의와 이국적 취향을 드러내었다.
갈리아노는 졸업 컬렉션으로 주목을 받은 이듬해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고 ’아프카니스탄은 서양의 이상을 거부한다(Afghanistan Repudiates Western Ideals).’라는 제목의 첫 컬렉션을 발표하였다.
이 컬렉션은 동양의 소재와 스타일링을 서양의 테일러링과 결합한 것으로, 역사적인 영향과 현대적인 트렌드의 조합이라는 그의 취향을 보여준 컬렉션이었다.
이후 그의 쇼는 언제나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컬러, 텍스처, 패턴, 이미지들을 다양하게 혼합하였으며, 이는 1990년대 이후 더욱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그가 심취했던 동양 문화는 18세기 초 영국인에게 비춰진 중국 황실의 이미지와 19세기의 일본 미술과 게이샤의 에로티시즘이었으며, 이외에도 인도, 티베트, 러시아, 이집트 등 다양한 지역의 여러 문화를 혼합한 스타일을 창조하였다.
그는 프린트물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특히 19세기 크리놀린 드레스를 장식했던 프린트 문양 등 역사적인 분위기의 문양들을 많이 사용하였고 이를 시폰, 벨벳, 타프타 등과 결합하였다.
그의 쇼는 이집트 신들의 가면을 이용하여 파라오의 땅으로 인도하거나, 극도로 호화로운 자수와 관능적으로 깊게 파인 데콜테(décolletés: 가슴, 어깨, 등을 깊게 판 네크라인)를 통해 베르사이유의 궁전으로 인도하거나, 신화적인 창조물을 통해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1997년, 마사이족 의상에서 영감을 얻은 디오르에서의 첫 컬렉션은 보다 세련된 에스닉 이미지를 보여준 컬렉션이었으며,
중국 인민복 이미지의 팬츠와 튜닉(’99 봄/여름 레디 투 웨어),
아프리카 이미지의 프린지 장식 드레스(‘99/2000 가을/겨울 레디 투 웨어),
볼륨이 매우 풍성한 기모노풍의 이브닝 드레스와 머메이드 실루엣의 결합(’2003 봄/여름 오트 쿠튀르),
발레복을 연상시키는 드레스와 중국 경극 메이크업의 결합(‘2005/2006 가을/겨울 오트 쿠튀르),
일본적 요소를 전반적으로 도입한 ‘2007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등 과거와 현재를 믹스하고,
동ㆍ서양의 문화를 융합하는 퓨전 스타일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판타지의 향연- 스토리가 있는 패션쇼
“나는 모든 컬렉션마다 배역을 정하며, 역사적인 것을 바탕으로 작품을 진행한다. 그것은 창조 과정의 일부이다.”라는 갈리아노의 말처럼, 그는 연극적인 컬렉션, 즉 스토리를 풀어내는 패션쇼를 많이 보여주었다.
그는 컬렉션을 통해 단지 화려하고 사치스럽기만 한 것이 아닌 환상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무대의상풍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의상은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었고, 특별한 무대가 더해지면서 패션쇼는 판타지와 몽상적인 분위기로 충만하였다.
1988년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여주인공에게서 영감을 얻은 동명의 컬렉션,
1992년의 ‘나폴레옹과 조세핀’ 컬렉션을 비롯하여,
바이어스 재단의 이브닝 가운과 파자마 수트로 대표되는 1994년 ‘루크레티아 공주(princess Lucretia)’ 컬렉션,
현대적 글래머러스를 새롭게 제안한 1995년 ‘미샤 디바(Misia Diva)’ 컬렉션,
벨 에포크와 마사이 공주, 천국의 새를 혼합한 1997년 디오르에서의 첫 번째 컬렉션,
이후의 수많은 디오르 컬렉션을 위하여 영감이 된 특정 대상을 주제로 실제의 인물 또는 가공의 인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패션쇼에 등장시켰다.
한 명의 모델이 여러 벌의 의상을 갈아입어야 하는 일반적인 패션쇼와는 달리 갈리아노 쇼의 모델들은 한 모델이 한 벌의 옷만 입고 각자의 배역을 연기하며 관객들을 판타지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컬렉션의 무대는 그날의 판타지에 걸맞는 장소로 변형되었다.
미식축구 경기장이 전나무가 가득한 마법의 숲으로, 파리의 오페라 극장이 영국의 티 파티장으로, 오래된 기차역이 동유럽의 시장으로, 때로는 눈 덮인 지붕이 만들어졌으며, 곡마장, 마굿간 등도 생겨났다.
그의 쇼는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이 정교한 화면을 만들어내었고 때문에 볼거리가 풍성한 블록버스터에 비견되었다.
특히 그는 모든 쇼의 피날레에서 그 컬렉션의 정신을 담은 의상을 입거나 변장을 하고 런웨이에서 워킹을 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으며, 그것은 갈리아노 쇼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다.
잘생기고 이국적이며, 특유의 미소와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카리스마를 가졌던 그는 무대 위에서 갈채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패션 천재의 추락: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떠나다
화려함이 가미된 역사주의와 관능적인 유혹, 판타지의 세계를 넘나들며 트렌드를 주도해 온 패션계의 악동이자 천재 갈리아노가 논란에 휩싸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011년 2월,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술에 취해 있던 갈리아노는 동석했던 커플과 시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혐의로 고소를 당하였다.
더불어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말한 이전의 동영상이 함께 공개되며 논란이 확산되었고 이에 디오르는 즉각 해고절차에 돌입하였으며, 3월 1일자로 그는 해임되었다.
그것은 10여 년 넘게 디오르를 혁신해 온 패션 천재의 추락이었다.
갈리아노는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피해자들에게 벌금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011년 8월에는 알코올 중독 등의 문제로 재활치료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자숙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인종이 함께 일하고 있는 패션계는 인종 차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으며 유대인을 모욕하는 발언은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패션계에서 갈리아노의 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의 해임으로, 2011년 3월 개최된 ‘2011-2012 가을/겨울 디오르의 기성복 컬렉션은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패션쇼의 피날레는 항상 갈리아노의 캣워크로 장식되었지만, 해임 이후 개최된 ’2011-2012 가을/겨울 컬렉션은 그를 대신하여 디오르 디자인팀의 디자이너 전원이 무대에 올라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갈리아노의 해임 후 디오르와 ‘존 갈리아노’ 컬렉션은 23년 동안 갈리아노의 오른팔로 작업을 함께했던 빌 게이튼(Bill Gaytten)이 잠시 맡아 진행하였다.
그러나 디오르는 그를 갈리아노의 후임으로 임명하지는 않았고, 한때 마크 제이콥스가 유력한 후임자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무산되는 등 최근까지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1년여 넘게 공석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4월,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새 수석디자이너로 질 샌더를 이끌어온 벨기에 출신의 라프 시몬스(Raf Simons)를 임명,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갈리아노가 떠난 디오르는 이제 라프 시몬스의 지휘하에 새로운 역사를 예고하며, 라프의 첫 디오르 패션쇼는 바로 지금, 2012년 7월 파리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참고문헌
Bonnie English, [Fashion], (Barron’s, 2009); B.Polan & R. Tredre, [The Great Fashion Designers], (Berg, 2009); Buxbaum, G.(Eds.), [Icons of Fashion: the 20th century], (Munich;London;NY: Prestel Verlag.,1999); Catherine Schwabb, [Talk about Fashion], (Flammarion, 2010); Charlotte Seeling, [Fashion-150 Years Couturiers Designers, Labels-], (h.f.ullmann, 2010); Colin McDowell, [Galliano], (Rizzoli, 1997); Hywel.D., [British Fashion Desigers], (Laurence King Publishers, 2009); 히웰 데이비스 지음, 박지호 역, [디자이너의 패션북], (1984, 2012); 정정희, 고현진, [디올 패션 하우스 디자인의 아이덴티티 연구], (복식, Vol.59 No.6. 2009); 이귀영, 조규화, [존 갈리아노 컬렉션의 디자인 특성에 관한 연구- 크리스찬 디오르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패션비즈니스학회지, Vol.13 No.2. 2009).
글 이진민 / 신구대학교 섬유의상코디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였다. 디자이너로 일하였고, 패션정보사이트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현재 신구대학교 섬유의상코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John Galliano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ohn Galliano
Born John Charles Galliano 28 November 1960
Nationality British
Education Central Saint Martins
Occupation Fashion designer
Partner(s) Alexis Roche
Awards British Fashion Designer of the Year for 1987, 1994, 1995 and 1997. Dress of the Year Fashion Museum, Bath for 1987.
John Charles Galliano CBE, RDI (born 28 November 1960) is a Gibraltar-born British fashion designer who was head designer of the French fashion companies John Galliano S.A. (1993 to April 2011),
Givenchy (January 1996 to October 1996), and Christian Dior (October 1996 to March 2011).
Family
He was born in Gibraltar to a Gibraltarian father, Juan Galliano, and a Spanish mother, Anita, and has two sisters.
Galliano's father was a plumber.
His family moved to England in pursuit of work when Galliano was six, and settled in Streatham, South London, before moving to Dulwich and later to Brockley.
He was raised in a strict Roman Catholic family.
Galliano, who was shy and diffident, often spoke of his struggle to fit in.
Recalling his early days, he once admitted: "I don’t think people here understood where I was coming from."
His mother, a flamenco teacher, would dress him in his "smartest" outfit even for a trip to the local shops.
This, combined with his creative sensibilities, saw him frequently bullied at the London boys' grammar school he attended.
Early career
After attending St. Anthony's RC School and Wilson's Grammar School in London, Galliano went on to study at Central Saint Martins College of Art and Design, from which he graduated in 1988 with a first class honours degree in Fashion Design.
His first collection was inspired by the French Revolution and entitled Les Incroyables, with a music soundtrack mixed by DJ Jeremy Healy.
The collection received positive reviews and was bought in its entirety for resale in the London fashion boutique Browns.
Galliano then started his own fashion label alongside long-term collaborators Amanda Harlech, at that time stylist with Harpers and Queen, and Stephen Jones, a milliner.
On the back of this success, Galliano rented studio space in London, but his talent was not matched by a head for business.
Moreover, he would take his enjoyment of London’s nightlife to extremes.
Initially, financial backing came from Johan Brun, and when this agreement came to an end, Danish entrepreneur Peder Bertelsen, owner of firm Aguecheek, who were also backing Katherine Hamnett at the time, took over.
This agreement ended in 1988 and Galliano sought the backing of German agent Faycal Amor (owner and designer of fashion label Plein Sud) who directed him to set up his base in Paris.
Galliano relocated to Paris in search of financial backing and a strong client base.
His first show was in 1989 as part of Paris Fashion Week.
By 1990, he was bankrupt and, after his own London-based label failed to re-ignite his fortunes, he moved to Paris.
Media fashion celebrity Susannah Constantine has worked for Galliano, and he has also aided the future success of other designers including shoe designer Patrick Cox.
In 1991, he collaborated with Kylie Minogue, designing the costumes for her Let's Get to It Tour.
Paris
In 1993, Galliano's financial agreement with Amor ended and he did not have a showing in October, missing the season.
With the help of American Vogue editor-in-chief Anna Wintour and Andre Leon Talley, then European Correspondent at Vanity Fair, Galliano was introduced to Portuguese socialite and fashion patron Sao Schlumberger and financial backers of venture firm Arbela Inc, John Bult and Mark Rice.
It was through this partnership that Galliano received the financial backing and high society stamp needed to give him credibility in Paris.
This collection was important in the development of Galliano as a fashion house, and is regarded as a 'fashion moment' in high fashion circles.
Givenchy
In July 1995, he was appointed as the designer of Givenchy by Bernard Arnault, owner of luxury goods conglomerate LVMH, thus becoming the first British designer to head a French haute couture house.
On 21 January 1996, Galliano presented his first couture show at the helm of Givenchy at the Stade de France.
The collection received high praise within the fashion media.
Some of Galliano's designs for Givenchy were licensed to Vogue Patterns.
Less than two years later, on 14 October 1996, LVMH moved Galliano to Christian Dior, replacing Italian designer Gianfranco Ferré.
Dior
John Galliano design for Dior, on display at the Royal Ontario Museum, 2011. Donated by Kara Alloway - Toronto
He has been quoted as identifying his love of theatre and femininity as central to his creations: "my role is to seduce", he has said, and has gone so far as recreating some of Dior's period clothing for Madonna in Evita.
He has also credited Standard Oil heiress Millicent Rogers as an influence.
Suspension and dismissal
On 25 February 2011, Dior announced that it had suspended Galliano following his arrest over an alleged anti-Semitic tirade in a Paris bar.
The same day, Paris-based citizen journalism site Citizenside received video of Galliano on a similar rant in the same bar the previous December.
In the video a drunk Galliano hurls anti-semitic rants at a group of Italian women and declares "I love Hitler... People like you would be dead. Your mothers, your forefathers would all be fucking gassed."
This incident happened just before Paris Fashion Week for Autumn/Winter 2011-12.
The video was licensed to British tabloid newspaper The Sun, which published the video on its website.
After his comments he was impersonated on Saturday Night Live by Taran Killam.
Natalie Portman, a Jerusalem-born American actress who is Jewish and whose great-grandparents died at Auschwitz, had an endorsement contract with Dior for its Miss Dior Cherie fragrance.
In a statement, she expressed "disgust" at Galliano's anti-semitic comments.
Portman said: “I am deeply shocked and disgusted by the video of John Galliano’s comments that surfaced today...I hope at the very least, these terrible comments remind us to reflect and act upon combating these still-existing prejudices that are the opposite of all that is beautiful."
Not everyone in the fashion industry shared Portman's disgust.
Stylist and costume designer Patricia Field defended Galliano by sending an email to 500 friends, blogs and media.
She dismissed Galliano's rants as "theatre." Later, in a phone interview with Women's Wear Daily, she described Galliano’s videotaped behaviour as “farce” and said she was bewildered that people in the fashion community have not recognised it as such.
"It's theatre ... It's farce. But people in fashion don’t recognise the farce in it. All of a sudden they don't know him. But it's OK when it's Mel Brooks's The Producers singing 'Springtime for Hitler'”, Field added.
Another model for Dior, French actress Eva Green, said of the incident: "Sometimes, you can make mistakes. I don't think he's anti-semitic. I'm Jewish. I don't think he has anything against the Jews. I think it's more that he was probably a bit drunk."
On 1 March 2011, Dior announced that it had begun procedures of dismissal for Galliano, with Dior's chief executive Sidney Toledano stating, "I very firmly condemn what was said by John Galliano".
After the incident Galliano's popular personal website was jammed and made unavailable for visitors.
Galliano denied the allegations through his attorney, and has launched a defamation lawsuit against the couple accusing him of antisemitism.
Various rumours have also surfaced stating that he was set up.
"From the very first day of Fashion Week, many editors have been saying that Dior wanted to get rid of him and that a plot like this would save it from having to pay him a reported £17 million", said Marcellous L. Jones, editor-in-chief of fashion web magazine TheFashionInsider.com.
Dior announced it will continue to support the Galliano brand financially due to license despite his previous scandal involving alleged anti-semitic remarks.
http://en.wikipedia.org/wiki/John_Gall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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