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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23, 2012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marilyn monroe. official site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사람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 무슨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봐요.
그들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보는 것이죠.
그들은 나를 음란하다고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은 결백한 척하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려 하지 않죠.
그 대신 나라는 사람을 마음대로 지어냅니다.
나는 그들과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니까.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바란 것이라곤,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야 공평한 거래지요,
그리고 나는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나는 정말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위의 말은 마릴린 먼로가 기자를 만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 도중에 나온 말이다.
마릴린 먼로가 한 말은 일부는 진실이고, 일부는 거짓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먼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위치, 역할에 대해서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그 역할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먼로 자신이 얻게 될 이득과 피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리란 것이다.

먼로를 모르는 남자는 있어도 먼로를 꿈꿔보지 않은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프랭크 시나트라, 이브 몽땅, 케네디 형제 등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이혼한 뒤에도 줄곧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해 온 조 디마지오와 두 번째 결혼 계획을 발표한 뒤 마릴린 먼로는 1962년 7월 31일 예식을 위해 마지막 옷 가봉을 했고,
8월 8일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 아니, 노마진 베이커는 8월 5일 치사량의 약물 복용으로 사망했다.

마릴린 먼로의 일거수일투족,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우리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우리는 마릴린 먼로를 알고 있었을까?
어차피 이 글의 끝은 대충 이렇게 끝나게 될 것이다.
"욕망의 객체로 사물화된 여성, 그러나 그녀 역시 한 명의 인간이라는 딜레마."
그 딜레마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하고 풀어갈 것인가가 결국 이 글의 주요 관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옥에서 태어난 천국의 육체

1926년 노마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할리우드의 필름편집자이던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기 전에 이미 남자로부터 버림받았고,
어린 딸은 어머니에게 드나드는 남자들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다.
마릴린 먼로의 외증조부는 팔순의 나이에 자살했고, 그녀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쳤다.
노마진이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 양부모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녀를 맡았던 법적인 후견인 양부모는 동부로 떠나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그녀를 처분하려고 결혼시킬 때까지
그녀는 10여 개의 보육원과 2년의 고아원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16세였다. 결혼 아니면 고아원행이었다.
그녀의 양어머니 그레이스가 나서서 적당한 신랑감을 찾았고, 그 결과 짐 도허티라는 21살의 남자가 남편으로 선택되었다.
결혼식장에서 수줍어 하며 노마진이 양어머니에게 물었다. "섹스는 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할 수는 없을까요?" 이때 그녀의 양어머니는 "어차피 곧 배우게 될 거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노마진은 금방 배웠고, 아내와 주부로서의 생활에도 익숙해졌지만 남편이 부인의 핀업 사진을 들고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군으로 떠나고, 그녀는 낙하산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1944년 그녀는 군수품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내세운 선전 사진에 나가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전문적인 사진 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모델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진작가 앙드레 드 디앙과 바람을 피웠고, 그의 조수인 윌리엄 번사이드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때 그녀는 대륙간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레일러 기사들을 위한 달력의 누드 사진 모델이 되었다.
한 편 종전후 귀국한 남편은 평범한 아내와 아이들을 원했으므로 노마진과 이혼했다.

노마진이 마릴린 먼로란 이름을 사용하고, 머리칼을 금발로 물들인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하지만 마릴린은 일당 5달러짜리 모델 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진짜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영화 쪽은 훨씬 더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할리우드에는 자신의 몸을 무기로 여배우가 되고 싶었던 수없이 많은 소녀들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드 모델 출신이었던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사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연예 매니지먼트사의 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스타가 아니었다.

유부남들이 파트너로는 최고예요, 자기 아내를 속였으니까

1947년 21세에 영화 <스쿠다후 스쿠다헤이>란 영화에서 대사 한 마디짜리 엑스트라 배우로 영화에 데뷔한 그녀는 영화의 단역 자리도 쉽게 따낼 수 없었다.
한 주에 65달러가 집세와 연기 수업료로 나갔고, 식사는 산타 모니카를 오가는 가로수길에서 때워야 했다.
60세의 아버지 같은 영화제작자 조 솅크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와의 관계가 시들해질 무렵, 그녀는 자신보다 열살 연상의 프레드 카거를 만나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매우 행복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드 카거는 마릴린 먼로라는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랑하는 척 했던 것이다.
20세기 폭스는 마릴린 먼로의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고, 사실 누가 보더라도 마릴린 먼로의 연기는 그녀의 몸매만큼 볼 만한 것이 못되었다.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20세기 폭스사는 마릴린 먼로를 해고했다.
폭스사에서 해고된 뒤 컬럼비아로 영화사를 옮긴 마릴린 먼로는 이곳에서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한순간에 다시 맨 밑으로 떨어져 버린 마릴린 먼로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은 그녀의 나이 22세 때 심장병을 앓고 있던 늙은 에이전트 자니 하이드였다.
자니 하이드는 마릴린 먼로보다 30살이나 연상이었지만 금발 미녀를 얻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렸고, 20세기 폭스사에서 그녀와 다시 계약을 맺도록 힘써주었다.
그리고 마릴린 먼로를 위해 헤어드레서와 연기코치를 배정해주었다.
그러나 먼로는 영화 배우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으므로 하이드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마릴린 먼로에게 할리우드의 감독이나 영화 제작자들과 관계하다 원치 않는 임신은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에게 성공은 일순간에 찾아왔다.

1950년에 그녀는 <아스팔트 정글>이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조역을 맡으며 호평을 얻었고, <이브에 관한 모든 것>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객들이 마릴린 먼로에게 호응하기 시작하자 제작자들은 그녀의 매력이 관능적 백치미에 있다고 판단하여
이후 일련의 영화들에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관능적인 백치미를 한층 더 부각시켜 나갔다.
<나이애가라>(1953)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쇼비즈니스 만한 비즈니스는 없다>(1954) 등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스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1952년 그녀에게는 예기치 못했던 장애물이 출현했다.
그녀가 아직 무명이던 시절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촬영했던 누드 사진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던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여배우의 스캔들은 치명적이었다.
미국 사회는 마치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영국처럼 청교도적인 근엄한 얼굴을 한 채 뒤로는 욕망의 질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유명해진 뒤 누드 사진을 이용해 그녀를 협박하자, 오히려 자신이 직접 사진을 공개해버렸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자 성공신화에 목말라했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성공을 위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관대했다.
그녀는 "전당포에 맡긴 차를 되찾기 위해 50달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을 입지전적인 인물로 포장했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 -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로버트 밋첨은 마릴린 먼로의 첫 남편의 동료였다.
마릴린 먼로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에게 대중과 언론이 던져준 면죄부는 그녀가 청순미를 과시하는 배우가 아니라 섹스 어필 하는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이 논란은 결과적으로 마릴린 먼로를 스타덤으로 끌어올리는 지렛대가 되었고, 이듬해인 1953년에는 휴 헤프너가 창간한 <플레이보이>는 창간호 커버에 먼로의 지나간 누드 사진을 게재했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을 찍은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풍선껌과 마릴린 먼로 그리고 미국문화

마릴린 먼로가 치른 3번의 결혼 중 가장 요란했던 것은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이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하였고, 그 정점에 섰을 때 과감히 은퇴한 그는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보고 그녀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스포츠 스타와 연예 스타간의 화려한 만남을 보고 싶었던 대중의 욕구는 언론을 움직였고, 영화 제작사도 이벤트를 원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는 스포츠를 몰랐고, 디마지오는 영화를 끔찍하게 지겨워 했다.
더군다나 디마지오는 매우 엄격한 이탈리아 이민가정 출신으로 가정에 헌신적인 배우자를 원했다.
이 두사람의 만남이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릴린 먼로가 <7년만의 외출>에서 유명한 뉴욕 지하철역 장면을 촬영한 뒤 급기야는 디마지오가 마릴린 먼로를 심하게 두들겨 패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마릴린 먼로는 다음날 시퍼런 멍자국을 숨기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해야 했다.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사랑했으나 먼로는 한 사람의 아내일 수 없었고, 남편 조차 그녀를 자신만의 것으로 온전히 할 수 없었다.
이들 부부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마릴린 먼로는 10대 때부터 거듭된 낙태 수술로 자궁이 엉망이 되었고, 몇 차례의 임신도 번번이 유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유명한 부부는 어딜 가나 자신의 팬들에게 휩싸여야 했다.
결혼한지 9개월만의 일이었다.
마릴린 먼로가 마약과 약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나는 여자로서는 실패했다.
남자들은 내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들이 나를 가지고 만든, 또 내가 나를 가지고 만든, 섹스 심볼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남자들은 너무 많이 기대하고, 나는 그 기대에 맞추어 살 수가 없다."

1954년에 이르자 그녀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섹스 심볼로서의 역할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마릴린 먼로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그녀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심각한 것이었다.
대중은 불꺼진 극장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열광하면서도 대낮에 거리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창녀'라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마릴린 먼로는 마르셀 프루스트나 에머슨 등 당대의 고전을 들고 다니며 자신의 지성 콤플렉스를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이 소유권의 51%를 갖는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을 설립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때 짖궂은 기자가 철자가 어떻게 되는 지를 묻자 "내가 말하는 이름의 철자는 하나도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마릴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 결혼하며 부부관계라기 보다는 '사제관계'에 가까운 관계이긴 했으나 그녀의 공식적인 관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결혼생활(3년 반)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프랭크 시내트라, 이브 몽땅과 염문을 뿌렸고, 곧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있는 남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남자가 바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였다.
훗날 먼로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자신의 주치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군인이에요. 나의 최고 상관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있는 남자지요.
군인의 첫 번째 임무는 사령관에게 복종하는 것이잖아요. 나는 그 남자를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존 F. 케네디는 자신의 생일 축하 파티에서 그 유명한 노래 <Mr. President>를 불러준 이 금발 미녀를 지겨워 했고,
자신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에게 넘겨줬다.
(일설에는 마피아가 케네디 형제의 약점을 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릴린 먼로를 붙여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국 대통령 형제에 의해 씹다 버린 풍선껌처럼 버려졌고, 곧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구소련의 한 신문은 "미국 문화를 생각할 때 뭐니 뭐니 해도 풍선껌과 마릴린 먼로를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풍선껌에 비유된 마릴린 먼로. 벗겨서 씹다가, 단물 빨아먹고, 실컷 가지고 놀다가 뱉아 버리는 그 풍선껌.
세 차례의 공식 혼인 관계와 상관없이 자신의 누드 사진 작가, 음악감독, 후견인, 잡지 기자, 햇병아리 배우, 음성 코치, 동업자, 그리고 말년에는 자신을 태우고 온 택시기사, 식당 종업원 등의 즉흥적인 섹스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그녀 자신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자신의 일생을 고백했다.

마릴린 먼로의 죽음

1962년 8월 5일 아침. 당시 나이 36세의 금발 머리의 글래머 여배우가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채 자택에서 발견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세기의 섹스 심볼로 추앙받았던 마릴린 먼로였다.
세상엔 마릴린 먼로의 사인은 약물과용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으나 그녀의 죽음이 약물과용에 의한 사고사인지 아니면 그녀가 의도한 자살인지,
아니면 케네디 형제와의 스캔들에 둘러 쌓인 의문의 살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다.
가정부에 의해 처음 발견된 그녀의 시체는 벌거벗은 채 침대 위에 축 늘어진 모양이었다.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의문들이 있는데 먼저 그녀의 사인이다.
그녀의 혈액에서는 다량의 수면제 성분이 발견되었지만 그녀의 위장에서는 수면제와 관련된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고, 만약 그녀가 수면제를 주사로 투입했다면 당연히 있을 법한 주사기 바늘이 나오지 않았다.
또 그녀의 죽은 모습이 보통 수면제 과용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개 수면제 과용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기 때문에 구토를 하게 되는데 그녀는 침대 위에 일자로 드러누운채 죽어 있었고, 구토의 흔적도 없었다.

그녀가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북돋는 정황들은 그외에도 케네디 형제와의 성관계 문제였다.
존 F. 케네디에서 로버트 케네디로 이어지는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에게 더욱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적극적인 마릴린 먼로가 부담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 개인전화번호를 바꾸었고, 그의 비서는 마릴린 먼로의 전화 연결을 거절했다.
그리고 마릴린 먼로는 자신의 친구에게 "만약 그가 계속 나를 피한다면 나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할지도 몰라." 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로버트 케네디가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이런 정황들은 그녀가 살해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더구나 그녀의 시체를 부검한 검시관의 의견과 그녀의 사건을 담당한 검사의 의견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등 그녀의 죽음에는 많은 논란과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로스엔젤레스의 경찰국장은 그녀의 죽음을 자살쪽으로 결론을 내렸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현장을 최초로 목격했던 경찰관의 의견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누군가에 의해 주사를 투여 받고 살해되었을 가망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한 마릴린 먼로의 진단서에 서명을 했던 검시관에 의하면 그녀의 부검 원본 파일이 사라졌으며 자살을 의미하지 않는 마릴린 먼로의 생전 마지막 메모와 그녀의 사건에 관한 첫 번째 경찰 보고서 또한 사라졌다고 말했다.

"마릴린 먼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 - 케이트 밀레트

유명한 여성학자이기도 한 '케이트 밀레트'는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만인(대중)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을 예수의 삶에 비유하는 불경(?)스런 발언을 하기도 한다.

마릴린 먼로의 전성기는 한국전쟁과 냉전, 핵폭탄의 공포, 미국 사회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여 마녀 사냥 같은 빨갱이 사냥으로 수많은 지식인들과 영화인,
예술가들을 궁지에 몰았던 때이자 전통적 도덕이 붕괴되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남성 사회의 저항을 뚫고 솟아나던 시기였다.
양차 대전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은 데카당스한 분위기에 젖어들었고, '섹스를 통한 구원'을 꿈꾸었다.
<플레이보이>가 창간된 것은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의 일이었고, 소련의 핵 실험으로 촉발된 미국의 어이없는 매카시 광풍은 대중들에게 골치 아프고 위험한 정치보다는 좀 더 안전한 섹스의 쾌락, 배설에 빠져들게 했다.

출처:http://windshoes.new21.org/actress-monroe.htm



In 1926 a girl was born in the charity ward at the Los Angeles County Hospital who would become one of the most celebrated and enduring icons of all time – Marilyn Monroe. Norma Jeane Mortenson’s childhood was volatile as she was passed from family members to family friends and frequently stayed in orphanages as a result of her mother’s mental health. To avoid another orphanage stay a family friend orchestrated a marriage proposal when she was sixteen years old. When her husband was sent to the Pacific with the merchant marine, Norma Jeane began working on an assembly line at an aeronautical plant.
In 1945 a photographer took a snapshot of the stunning brunette while at the factory and within months she became a successful model securing dozens of magazine covers and a screen test with 20th Century Fox. Studio executives, directors and photographers immediately recognized her ability to capture and hold the attention of anyone on the opposite end of a camera lens. By the end of 1946 her hair had become a platinum shade of blonde and her name was changed to Marilyn Monroe.
Over a little more than a decade Monroe captivated audiences through a multitude of comedic and dramatic roles. Audiences loved her breathy, blonde bombshell appeal combined with her light comedic approach in How To Marry A Millionaire, Gentlemen Prefer Blondes, The Seven-Year Itch and Some Like It Hot. She was serious about her craft and delivered believable, flawed characters in Don’t Bother To Knock and Niagara. She worked closely with Lee Strasberg at The Actor’s Studio who referred to her as one of the two students out of “hundreds and hundreds” that stood out above the rest. The other was Marlon Brando. In 1956 the New York Times film critic Bosley Crowther reported on her breakthrough role, “HOLD onto your chairs, everybody, and get set for a rattling surprise. Marilyn Monroe has finally proved herself an actress in Bus Stop. She and the picture are swell!” Although it didn’t get good reviews The Misfits is one of Monroe’s most staggering and indelible performances. She received a Golden Globe award for her performance in Some Like It Hot and a Golden Globe nomination for her performance in Bus Stop.
In 1962 Marilyn Monroe bought her first home in Brentwood and began decorating it with purchases from a trip she had made to Mexico. She died that same year in her new home under controversial circumstances. Regardless, Marilyn Monroe’s personal history, achievements and contributions have made her one of the world’s greatest icons. She inspired musicians, writers and artists like Madonna, Elton John, Lady Gaga, Joyce Carol Oates and Andy Warhol to name just a few with her timeless glamour and extraordinary character. More relevant today than ever Marilyn Monroe lived a life and left a legacy that continues to excite fans all over the world.

출처: http://marilynmonro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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