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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18, 2012

장국영.


장국영은 1956년 홍콩의 부유한 양복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유학을 떠나 영국 리즈 대학 섬유관리학과를 졸업했다. 지난 1977년 홍콩 ATV가 주최한 아시아가요제에서 2위로 입상하며 가요계에 데뷔했으나 인기를 끌지 못하자 방향을 바꿔 1978년 영화 [홍루춘상춘]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이후의 음반 [풍계속취]와 [모니카]는 성공을 거둬 3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훗날 그는 [금지옥엽]과 [야반가성] 등의 영화에서 직접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장국영은 누아르 영화인 [영웅본색]으로 이름을 알렸고 왕조현과 함께 주연을 맡았던 [천녀유혼]으로 장국영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는 투유 초콜릿 등 국내 CF의 모델로도 활동했으며 국내에서 수차례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 1993년에는 경극을 소재로한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가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동경가요제에 참가했을 당시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언급한 것이 물의를 빚자, 1990년 정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10대 소녀팬들이 자살소동을 일으키는 등, 떠들썩한 은퇴식을 치른 장국영은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지만 2년 뒤인 1992년 [가유희사]로 영화계에 복귀했고 1995년 [총애장국영]으로 가수 생활도 재개했다. 그러나 매혹적인 연기와 수려한 외모로 관객들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해왔던 그는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 같이 세상을 떠났다.


장국영 인터뷰 



 가정 환경

- 먼저, 저는 당신의 가정환경부터 묻겠습니다.
 우리 집은 홍콩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다. 아버지는 매우 유명한 재단사였는데, 말론 브란도등의 옷은 우리 아버지가 만드신 옷이다. 이러한 시기가 있었기에,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국대륙에서 온 후로, 홍콩을 그다지 믿지 않아서, 번 돈을 전부 대륙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중,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

- 당신의 아버지는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별다른 인상이 없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매우 바쁘셨기 때문에, 센트럴(홍콩지명)의 회사 부근에 아파트를 빌려서 머무르셨고, 나의 형제자매 모두 외할머니집에서 자라났다.

- 그렇다면, 어렸을 때 당신을 돌봐 준 사람은 외할머니인가요?
 외할머니는 연세가 많이 드셨기 때문에, 나를 돌봐준 사람은 '六姐'라고 불렀던 보모이다. 어렸을 때, 나를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인 셈이다.

- 六姐'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여성이다. 그녀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사랑을 바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그녀는 그런 식이며, 특별히 나를 유달리 귀여워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六姐'와 같은 이러한 여성을 아직까지 다시 만나보지 못했다.

- 그녀의 말년은?
  나이가 들은 후에 줄곧 혼자서 내가 그녀에게 사준 집에서 살았다. 90년에, 그녀는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당신의 어렸을 때의 기억 속에서, 인상이 가장 깊었던 장면은 무엇입니까?
  6살 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서, 매일 의자 위에 앉아 계셨고, 단지 주무실 때에만 침대로 돌아오셨다. 그날(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집에 돌아와서, 외할머니께서 의자에 앉아서 돌아가신 것을 발견했다. 그 장면은 현재까지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4세                                                    5세                                                               6세

- 당신의 형제자매는?
   나는 10형제자매 중 막내이다, 그렇지만, 셋째 형·넷째 누나·아홉째형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실제론 7형제자매이다. 나와 죽은 아홉째형은 생일이 같아서, 줄곧 형이 다시 환생해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형제자매가 많지만, 나와 다른 사람은 나이 차가 매우 커서, 함께 논 적이 없다. 게다가 아버지는 아이들이 자기주변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어머니 또한 매우 바쁘셨다. 어린 시절은 정말 즐겁지 않았다. 만약 나에게 무슨 즐거웠던 일을 기억해 내라고 한다면, 내 머리 속에서는 어떤 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 당신은 어떤 아이였습니까?
  조금은 이상한 아이였다. 아이 같지 않고, 또 말도 별로 하지 않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우리집은 결코 특별히 큰 가정은 아니였지만, 손님이 왔을 때, 어떤 사람도 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천성적으로 이러한 성격인지는 모르겠다. 줄곧 매우 외로웠고, 감명을 토로할 대상도 없었으며, 언제 이런 성격이 형성되었는지는 모르겠다.

- 이웃의 아이들과 함께 논 적이 없습니까?
  나의 부모님은 매우 엄하셨다. 이웃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들을, 부모님은 절대 우리들이 놀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당시 홍콩사회에서는, 아이들이 무슨 놀이를 하느냐에 따라 그 집안수준을 알 수 있었고, 부모님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수준 낮은 가정의 아이들로 보기를 원치 않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관하여...

- 보아하니, 당신은 부모님에 대하여, 좋았던 기억이 없었던 거 같은데요?
  역시 연분이 별로 그다지 깊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버지는 단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음력설날 때에  집으로 돌아와 5일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그중 3일은 술에 취한 채 잠들었는데, 그것이 함께 산 유일한 기억이다. 그래서 나는 일반 가정의 그런 친밀한 정과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는, 이러한 관계와 부모와의 친밀한 정을 말하는 것보다는 다만 친구들과의 일반적인 관계에 대해 말하는 편이 낫다.

- 당신의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나요?
  89년, 내가 가수를 은퇴하던 그 해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은퇴기념순회콘서트를 하고있어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정말 연분이 깊지 않은 것 같다.

- 당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주:장국영의 어머니는 98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와 비교하면, 어머니의 인상은 비교적 깊다. 88년에 어머니께서 내가 사는 곳에 오셔서, 반년 정도 함께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말해야 되나..........난 혼자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또한 어머니와 나는 이전에는 모자간의 친밀한 관계가 없었는데, 갑자기 한 순간에 함께 살게 되니, 역시 바로 그러한 감정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줄곧 이전의 거리를 줄일려고 노력하였고, 또한 되도록 정신적 측면에서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시도하였으나, 결국에 난 여전히 어머니에게  단지 돈과 물질적인 것들만 만족시킬 수 있었다. 어머니는 결코 기쁘지 않으셨던 것 같았다.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조금씩 틈이 생기기 시작해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비록 그녀는 여전히 아버지를 매우 사랑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그녀를 이해하지 않으셨고,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이외에는, 누구도 그녀를 위해서 뭘 한다 해도,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어떻게든 어머니에 기운을 북돋아 줄려고 했지만, 어떻게 하던지 어머니 마음속의 상처를 달래줄 방법이 없었다.

- 그러나, 아버지와 비교해서, 당신은 어머니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예를 들면 내가 유학했을 때이다. 나는 줄곧 내가 영국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지지해준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삼촌으로부터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여러 번 요구하셔서, 내가 영국에 유학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래서, 비록 나의 교육은 완벽하게 끝난 건 아니지만, 현재의 이러한 기초를 세워준 것은,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양한 일들이 떠오르지 않았나요?
  실제로, 원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시는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양한 기억의 장면들이 아니라, 어머니가 존재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출생, 기뻤던 일, 슬펐던 일, 다양한 일들, 자세히 생각해보면 모든 어머니로부터 얻은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매우 감사드린다.

- 당신은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더 효도했어야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잠시 침묵 후에).....내 스스로 이야기를 한다면,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또한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물어본다면, 그녀 역시 반드시 나에게 만족하신다고 하실 것이다. 나는 조금은 보수적이 사람이라, 인(因)과 연(緣)이라는 것을 매우 믿는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비로소 서로의 존재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서로 이것을 느꼈을 때, 이미 늦었었다. 그래서 이 생애의 '최고의 콤비'는 실현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와 나 사이의 숙명은 변화시킬 수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첫사랑, 학창시절

- 첫사랑은 언제였나요? 상대방은 어떠한 여성이었죠?
  13살 때이다. 실제로 그것이 첫사랑인지 아닌지 확실치는 않다. 상대방은 걸음이 아주 빨랐으며, 항상 단련되어있는 여자였다. 미소는 예뻤고, 몸매는 아주 좋았으며, 매우 건방진 태도를 지녔었다. 그 때, 나는 그러한 여자아이를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가 안지 오래되지 않아, 나는 영국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걸로 끝이 났다. 3년 이후에 홍콩에 돌아온 후,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됐고, 함께 마카오로 놀러가서, 그곳에서 나의 첫 경험을 했다.

- 16살 때 첫 경험이 있었다구요? 당시로서는 이른 것이 아니었나요?
  음, 그렇다. 그러나, 그때에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하게 되었다.

- 그때라구요? 그럼 그후에는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았다. 점점 각자 문제를 생각하는 방식과 인생관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후에 그녀는 나의 동창과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 작년에 우연히 만났는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에 곧 헤어졌다.

- 현재 그녀는 아직도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존재인가요?
  아니, 아니다. 현재 그녀는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되다 하더라도, 무슨 특별한 감정은 없다.

- 당신은 학창 시절 때,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을 거 같은데요?
  지금 저 말하는 겁니까? (매우 간단명료하게)그러한 일은 없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단지 한 여자아이만이 나를 좋아했다. 비록 같은 반 친구들은 여자아이들이 좋아해 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 때 단지 테니스, 배구 등 이러한 운동을 하면서 노는 것만 알았다.

- 당신은 당신의 성격이 내성적이었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 적어도 외향적이지는 않았다. (하하^__^)

하고싶은 직업

- 어렸을 때, 커서 무엇을 하고 싶었나요?
  사실 나는 두 가지의 꿈이 있었다. 하나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떠는 유전체질이 있다. 그래서 될 수 없었다. 다른 꿈은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없어서, 이것도 할 수 없었다.(^__^) 지금도 비행기안에 앉아서 난기류를 만날 때에는, 나는 아직도 아주 두렵다.

- 그렇다면, 만일 당신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건가요?
  나는 실내장식가가 되거나, 미술평론을 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이외에도 나는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나는 피아노는 아주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에, 피아노를 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특히 내가 작곡할 때에는, 피아노만 칠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피아노를 전공으로 친다면, 나는 또한 자유롭게 작곡할 수 없을 것이다.

- 피아노를 치는 것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요!
  할 수 없다. 과거에도 할 수 없었고, 현재도 할 수 없고, 미래에도 할 수 없다.......내가 아직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나?, 나의 오른손과 왼손의 모양은 다르다. 22살 때, 왼쪽손목의 뒷면과 손뼈 양쪽에 두 개의 종양이 자라고 있어서, 수술을 했다. 그래서, 왼손이 조금 작아졌다. 또한 손의 힘도 제대로 쓸 수 없다. 오른쪽 손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매우 많은 시간을 물리치료 하는데 힘썼다.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왼손은 아직도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다.

영국유학

 

- 영국에 유학 갈 당시, 당신은 13살이었는데, 유학은 당신이 원해서인가요? 아니면 부모님이 원해서인가요?
  당연히 내가 원해서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성적이 매우 좋았는데,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성적이 계속 떨어졌다. 원인은 나의 수학성적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대수 등 갑자기 과목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나는 원래 문과형이라서, 문학·음악 등에 비교적 재능이 있었는데, 수학적인 문제에 부딪히니, 완전히 할 수 없었다. 이론적인 문제에는 재능이 없었다. 때마침 외국에 나가면, 수학은 비교적 쉽다는 말을 들었고, "아,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러면, 영국학교의 수학과목은 매우 쉬웠나요?
  그렇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였지만, 쉽게 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수업 중, 가장 재능이 있었던 것은 영국문학이었는데, 반에서 성적이 제일 좋았으며, 상도 탄 적이 있었다.

- 전공한 영국문학의 작가는 누구였나요?
  D·H로렌스와 세익스피어이다. 나는 홍콩에 있을 때 시를 읽는 것을 좋아했고,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탄 적이 있었다. 나는 재능이 있는 분야와 재능이 없는 분야에서 확실히 구분되는 사람이다.

- 방금 당신은 실내장식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수학성적이 안 좋다면 어렵지 않겠나요?
  그렇다. 실제로 나는 건축·설계등에 매우 관심이 있는데, 그러나 정말로 나에게 설계를 시킨다면, 바로 망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말로 할 수 있다면, 실내장식만 할 수 있을 것이다.(하하^___^) 예를 들어, 이곳에 이런 가구를 놓고, 저곳엔 저런 장식품을 놓고, 단지 위치만 정할 수 있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가신 일을 야기시킬 것이다.(하하^__^)

- 당신이 영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공부한 것은 문학이 아니었지요?
  그렇다. 공부한 것은 방직이다. 그것은 내 아버지가 원한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역시 자식이 자신의 일과 관련된 일을 하기를 희망하셨다. 그러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반신마비가 되셔서, 갑자기 나를 홍콩으로 부르셨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가수가 된 일과 우상시대

 

- 홍콩에 돌아온 이후, 당신은 RTV(지금의 ATV)주최의 가창대회에 참여했지요, 그때의 상황은 어땠나요?
  내가 영국에서 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나는 친구의 가게에서 노래를 불렀다. 홍콩에 돌아온 후, 팝송이 매우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시험삼아 그냥 놀 생각으로 나간 것이었고, 당시에는 가수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신은 2등을 했고, 또한 RTV와 계약을 했는데........
  그렇다. 그러나 결코 처음부터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77년부터 83년까지 <MONICA> 단 한 곡만이 성과를 거두었고, 기본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그때의 나는 청바지와 소매 없는 러닝셔츠를 입고, 영어노래를 불렀다. 당시에는 서양식의 의상이 환영을 받았으며, 나는 젊고, 인형 같은 얼굴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시대의 요구에 맞는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 그러면 당신의 힘들었던 그 시절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있습니까?
  많다. 그 중에 가장 가슴이 아팠고, 가장 비참했던 일이 생각난다. 한번은 당시의 많은 가수들이 참여한 콘서트가 있었는데, 내 차례가 되어서,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관중을 향해서 던졌는데, 한 사람도 그것을 줍지 않았고, 모자는 다시 무대로 되돌아왔다, 너무 지나쳤던 것 같았다. (^__^) 지금 생각하면 괜찮지만, 그 때에는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 그러나 당신은 영화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주인공을 하지 않았나요? 일찍부터 영화배우에 관심이 있었나요?
  나는 일찍이 영화에 관심이 있었다. 영화방면에서 확실히 운이 좋았다, 시작부터 주인공으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기억이 잘못 되지 않았다면, 첫 영화는 79년도였다. 한 편의 코믹하고 약간은 러브씬도 있었던 영화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나 스스로 영화를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역할을 연기했다. 나이도 어렸고,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어떤 배역이든지 연기했다. 많은 것들을 비록 영광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 중에, 나이가 들어가고 성장하게 된다.

- 지금 생각해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가 있나요?
  의외로 없다. 그러나 그 때의 영화를 볼 때면, 그 때의 힘들었던 생활이 떠오른다. 그 때에, 나의 은행계좌에는 1000홍콩달러를 넘지 않는 돈이 있었다. 그때는 1000홍콩달러만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었다.

- 7년간의 불행했던 시기에 실망한 적은 없었나요?
  사실상, 나는 그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말하냐면, 당시의 홍콩연예계는 기본적으로 누구든 단 한번만에 우상이 되지 않았다, 성공을 하려면 일반적으로 10년 정도 걸린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 그렇다면, 당신은 하루라도 당신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나요?
  음, 그렇게 말한다면, 비록 나는 그러한 확신은 없었지만, 사실상 나는 줄곧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명가수 '許冠傑, 羅文, 林子祥'이 나에게 준 영향은 크다. 그러나, 홍콩에서 모방에 의존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고, 또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자신의 개성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  당시에는 일본가수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고 생각하는데, 맞나요?
  그렇다. 나는 일본가수에게 받은 영향이 홍콩가수에게 받은 영향보다 컸다고 생각한다.  '西城秀樹, 澤田硏二, 五輪眞弓'등등...특별히 山口百惠의 영향은 매우 강렬했다. 나는 그녀의 <風繼續吹>를 번안해 불러, 금상을 탔다. <MONICA>는 한 발 더 나아가, 백금상을 탔다. 나에게 <風繼續吹>가 남겨준 기억은 매우 깊어서, 나는 그 금상을 나의 커피숍에 걸어놓았다.

- 그때부터 당신은 우상으로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는데요, 우상시대의 생활은 어떠해나요?
  그때의 매일매일은 지금보다 훨씬 바빴다. 가수와 배우를 겸업했는데, 당시에는 가수활동에 더욱 전념했고, 또한 "반드시 이겨야한다"라는 의식이 매우 강했다. .....소위 말하는 '배고픈 예술인'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광고든 외국공연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그때에는 시종 스스로 정신긴장의 상태에 처해 있다고 강박 되어 있었다. 우상의 생활은 결코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부러움을 살만한 것이 아니다. 관중의 꿈을 만족시키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반드시 항상 수려, 영준함을 유지해야 했고, 팬들과 관중을 위해, 이러한 생각의 지배하에, 점점 자아를 잃어가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은퇴, 컴백

- 89년, 당신은 인기절정기에 가수생활에서 은퇴를 했는데, 당신은 인기인 생활이 피곤했습니까?
  그렇다. 연예계의 규율은 매우 가혹했다. 당시 譚詠麟(알란 탐)과의 경쟁이 매우 격렬해서, 노래 외에도 모든 면에서 비교를 당했고, 언론 역시 매우 정상적이지 못해서, 사소한 작은 일을 큰 일로 과장해서 보도하기까지 했다. 연예계라는 것은 언론보도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이 보도되면 곧 화를 내곤 했다. 우상이라는 것은 소문에 상처를 받고, 깨지기 쉬운 존재이다. 그래서 다시는 가수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가수의 세계는 경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패의 세계에서 벗어난 후, 안정된 생활을 보내기를 원했다.

- 어떤 사람은 당신의 은퇴는 山口百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약간의 영향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기절정기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은퇴를 했고, 결혼 후 남편을 모시고 자식을 돌보는 생활을 선택하였다. 나는 이러한 행동이 매우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에 나는 일찍이 梅艶芳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우리들도 자신의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은퇴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한다고 말이다. 이전의 여러 명의 선배들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만일 은퇴를 원한다면, 인기절정기에 은퇴하는 것이 가장 똑똑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만일 은퇴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고 변함없이 있을 수는 없다.......관중의 의식속에는 잔혹한 성향이 있어서,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항상 같은 것에 대해서는 즉시 반감을 나타낸다.

- 가수로서 은퇴한 것뿐만 아니라, 캐나다로 이민하기로 결심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홍콩반환은 점점 가까워져가고, 정치적으로 무슨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외에도 밴쿠버(캐나다 지명)의 자연·환경모두 아주 좋아서, 홍콩에서 성장하고, 격렬한 경쟁으로 피곤해진 나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피난장소였다.

- 그러나 1년도 채 안 되어서, 당신은 다시 돌아왔는데...
  그렇다. 무언가가 빠진 듯 했다. 나는 겨우 33살이었고, 시골로 피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당신은 밀란·쿤테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나? 바로 그러한 심정이다. 매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주위에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당신에게 관심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러한 생활은 확실히 매우 자유롭고, 매우 홀가분하지만, 혼자서 느슨하게 생활을 한다면, 자신의 존재의 가치는 매우 적어질 것이다. 캐나다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을 말하자면, 실제로 내 스스로가 아주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 연예계는 추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 연예계는 중독과 같다. 일단 성공을 하면, 명예·돈·지위도 함께 따라 와서, 항상 두 배로 주목받는 존재가 된다. 확실히, 항상 이러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을 슬프게 하는 일이나 싫은 일도 매우 많지만, 유명인이 일반인으로 완전하게 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 그러나 복귀한 이후의 당신은 이미 이전의 우상이었던 당신과는 달랐습니다.
  당연하다. 나 스스로 이미 이전과 다른 단계에 들어섰다. 만일 이렇지 못했다면 다시 복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나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 어떻게 말하든 간에, 젊었을 때의 우상이 될 생각은 없다. 현재 나는 우상시대처럼 그렇게 필사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 된다. 이러한 상태는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좋다.

 唐선생과 관계 있는 일

- 당신은 당신의 성격이 연예인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정적인 방법으로 하는 직업에 대해 원래부터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이 일은, 주위의 사람들 모두 나를 도와주고, 나 스스로 규칙방법을 만든다. 당연히 연예인라면,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이 폭로되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은 매일 똑같은 일을 해야 하는 고정적인 일을 싫어했기 때문에, 연예인이 된다면, 하고자 하는 일만 하면 되기 때문에, 나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 당신은 유언비어를 불쾌하게 생각합니까?
  이전과 비교해 본다면, 현재는 많이 좋아졌다. 이것이 나의 팬들이 홍콩의 스캔들기사를 믿지 않고, 나를 믿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유언비어를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 말하든 간에, 그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개의해도 방법이 없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신이 믿는 바를 믿는 것이다.

- 말은 이렇게 해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유쾌하지 않죠. 무엇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그렇게 쓰는지...
  당연하다. 마음속으로는 편하지 않다.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이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 모든 언론의 초점은 당선생(장국영의 친구)에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이것이 매우 불공평하고, 돌아가신 분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연예인이던 간에, 사람들에 의해 많은 것들이 쓰여지는 것에 대해 방법이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형제자매, 또 내 친구들에 대해 함부로 쓰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다. 그들은 언론매체에 의해 함부로 쓰여질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보호해야 하고, 또한 그들을 보호할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 당신에게 당선생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이다. 그에 대해서는, 나는 어떠한 것도 모두 말할 수 있다. 그는 마치 나의 동생 같다. 나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나의 어머니는 그의 대모(중국에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 외에, 어린아이의 장래를 위해 대부·대모를 삼는 습관이 있어서, 일생동안 친부모처럼 여긴다)였고, 특별히 그의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간 이후에, 그는 우리가족과도 같았다. 나는 평생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인기가 없었을 시절에, 한번은 어떤 일이 생겨서, 갑자기 돈이 필요했다. 그때가 나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몇 개월의 월급에 상당하는 돈을 나에게 빌려주었다. 후에 나는 그가 몇 달 동안 가장 싼 도시락만 먹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이렇게 내 곁에 있어준 친구는 그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내 평생의 친구로 생각한다. 그는 나의 많은 친구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 그는 나에게 특별하고, 매우 중요한 친구이다.

- 언론이 당신과 당선생의 관계에 대해 줄곧 가십거리를 만드는데,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봅니까?
  사실 정말로 싫다. 나는 괜찮지만, 그는 단지 일반 샐러리맨인데, 오히려 기자들이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니,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나는 정말로 그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의 형제자매도 이런 경우였다. 나의 형과 누나들이 이혼했을 때, 언론은 크게 떠들어댔다. 당신들이 나에 대해 무엇을 쓰던 간에, 나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나의 친척친구들에 대해 쓰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것은 어떻게 말하든 간에 불공평하다!

연애와 결혼관


- 당신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이것은 내가 사생활에 대해 공개하지 않고, 가끔 언론에 비추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기엔, 무엇이든 다 폭로하면, 그것은 의미가 없지 않나? 당연히, 내가 매일 나 자신을 집안에 가둬두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커피숍을 연 것은 나의 팬들과 만날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나에게 요구만 한다면, 나는 싸인을 해주고, 또 함께 사진도 찍는다. 나의 문은 항상 열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집과 나의 생활, 나의 친척·친구등을 공개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나의 사생활은 숨겨두길 원한다. 항상 어떤 사람은 나에게 "당신은 결혼하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이것은 나 개인의 문제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당신의 팬들은 당연히 관심 있어한다. 그들은 당신처럼 매력적인 사람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혹시 결혼할 생각이 없는지 궁금해한다.
  당신은 정말로 그것을 알고 싶은가?(하하^___^)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결혼에 대한 꿈이 없다, 나는 결혼을 믿지 않는다. 우리집안에 이혼이 많았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어렸을 때부터 나의 형과 누나들의 이혼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조금의 믿음도 없다. 나는 결혼에 대해 좋은 인상이 없다. 그래서 일생동안 결혼을 안 할 수도 있다. (기자를 향해서)당신은 결혼을 했나? 당신의 남편과 사이가 좋은가? 이혼을 생각해 본적이 있나?(매우 빠르게 물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일생동안 결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나의 가정을 아주 중요시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친척들, 가족들과 연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내 집에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놓고,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 현재까지 당신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나요?
 있다, 그것 역시 아주 어렸을 때이다. 그때는 22세였던 것 같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나는 매우 신중하게 결혼을 고려했었다. 그러나, 후에 그녀는 갑자기 정신착란을 일으켜, 행동이 매우 기이하게 변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난 어렸었다.....결국은, 매우 씁쓸한 결말이었다.

- 이후에 당신은 다시 신중하게 결혼을 고려해 본적이 없나요?
  없다. 아마 내 요구사항이 매우 높아서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 일반인이 70%면 만족하는 일을, 나는 95%정도 되야 만족할 수 있다. 사실상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일도, 내 경우가 되면 만족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당선생 역시 "너는 완벽주의자다. 이미 아주 좋은데, 너는 만족할 수 없으니, 정말 안타깝다."라고 나에게 말한다. 그를 보면, 그는 설사 작은 일이라도, 그는 감동을 하고, 기뻐한다, 어떨 땐 나는 정말로 그가 부럽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의 표준을 낮출 수 없다.

- 여성에 대해서도 이렇습니까?
  이것은 말이다, 내가 만일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매우 많아서, 결과적으로 실망하게 된다. 나는 정말 이런 실망이 두렵다. 더군다나 나는 이미 42살이다,  이미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이의 한계에 이르렀다. 만일 20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 역시 그녀를 괜찮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나이에 관계없이, 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나는 사랑만으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또한 장래적인 문제와 환경적인 문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다. 나이는 많고, 요구사항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 외에도, 젊은 사람의 탄력과 열정 역시 점점 적어져서, 매우 어렵다.

- 말은 이렇게 해도, 당신을 좋아하는 여성은 분명히 많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겠다. 현재의 이 나이에 이르러, 마음대로 사랑에 빠질 순 없다. 만약 여자아이가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나는 "이상하다, 왜 그렇지"라고 생각할 것이다.(하하^__^) 정말이다. 많은 장래의 일들을 고려할 때, 나는 걱정된다.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려면, 사랑 외에도, 각자의 성격·생각·생활 방식 등등의 많은 방면에서 서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나와 어머니의 예에서 본다면, 우리는 비록 모자관계지만, 몇 십 년 후에 갑자기 함께 살게 되니, 서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당연히, 충분하게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간에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 보아하니 심리적인 측면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당연히 이렇다. 단지 마음이 통하며, 이러한 일들을 사랑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당연히, 나도 그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면 묻겠는데, 당신이 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만일 누가 나에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묻는다면, 나는 "자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자신이외의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는 말만 말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당신은 양성애자인가요?
  나는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 역시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치 않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든 간에, 어쨋든 나는 이런 운 좋은 상황에 부딪힌 적이 없다. 만일 남녀모두 ok한다면, 기회는 두 배가 되는데, 당신 같으면 뭐가 안 좋다고 말하겠나?(하하^__^)

스타로서

- <覇王別姬>와 <春光乍泄>에서 보여준 모습, 또 콘서트에서 당신은 빨간색하이힐을 신고 탱고를 춘 것 등, 당신이 펼친 것은 모두 성별을 초월한 것이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요?
  아니다, 이것에 결코 무슨 특별한 관계는 없다. 나 역시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시도해 본적이 없다. <覇王別姬>에서는, 첸카이케감독은 나는 줄곧 비교적 잘생긴 풋내기배역을 많이 연기해서, 역할이 항상 고정적이고, 그래서 그는 나를 연기자로 만들기를 원했고, 내가 충분히 귀여운 여성적인 부분을 연기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春光乍泄>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동성연애문제가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동성연애자를 연기해보는 것도 흥미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콘서트 상에서는, 약간의 자극적인 요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때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한 사람의 생각이었다. David bowie가 무대 위에서 여성으로 분했을 때, 반향은 매우 컸는데, 그는 아시아에서 이렇게 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은 원래 경극을 하려고 했는데, 화장과 의상문제가 어려워서, 그것을 대신할 것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홍>에 근거해서, 립스틱을 바를 생각을 해냈다. 그러나 홍콩홍캄체육관은 너무 커서, 관중석과 무대가 너무 멀어서, 관중들은 야광 립스틱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빨간 하이힐을 신었던 것이다.

- 콘서트나 영화에서 보면, 당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매우 자아도취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데, 현실상에서도 당신은 자아도취적인 사람인가요?
  내가 연기한 배역 중에, 확실히 자아도취적인 역할이 비교적 많았다, 내 자신은....음..어떻게 말해야 하나.......(상당히 긴 시간을 생각한 후에) 영화나 콘서트에서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관중들에게 최고의 내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 외에는 나는 거울도 보지 않고, 또한 내 외모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 적어도 나는 집안이나 가게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자면, 당신은 확실히 잘 생겼어요. 거울 속의 당신의 얼굴을 볼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죠?
  '와~정말 잘 생겼다!'(하하^_____^). 아니다, 아니다, 농담이다. 사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없다.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자신의 얼굴은 익숙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일찍부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응석받이다''버릇없다''건방지다'등등의 말을 들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고 싶은 일에는 바른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중국인은 무엇을 문제 삼든 직언하고 숨기지 않으며, 되도록 빙빙 돌려 말하고, 완곡하게 표현해서, 귀찮은 일을 만들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자아도취와는 상관이 없다.

- 당신의 매력에 대해 많은 말로 형용하는데요, 예를 들자면 '귀엽다''잘생겼다''섹시하다'등이 있는데, 당신은 어느 말이 가장 기쁘나요?
  나의 팬들의 눈으로 나를 볼 때는, '귀엽다'도 좋고, '잘생겼다'도 좋고, 어떻게 보든 나는 기쁘다. 그러나 만일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어떤 말도 나는 싫다. 단지 외면상으로 찬미하는 것은 기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떤 말을 들으면 가장 기쁘겠나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찬양하는 말 중에서, 이 말이 가장 감동적이다.

- '스타장국영'은 당신자신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연기에서 나온 하나의 상품인가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결코 내가 무엇을 연기하고 있다고 의식한 적이 없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나 자신과 배우 장국영 사이에, 결코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속에서의 나의 존재가치와(당신이 생각하기에도 이렇습니까? 기자에게 되묻는다.) 동시에 나의 스타로서의 소질과 타고난 재능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은 본래 만화경과 같아서, 다만 사람들에게 자신의 하나의 측면만을 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화팬이나 노래팬들에 관계없이 팬들이든, 언론이든, 그들은 단지 우리들의 한 면만 보고, 게다가 그들의 본 한 면에 근거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다양한 착각을 만들어 내게 된다. 팬들은 늘 좋아하는 스타의 신화적인 면만을 보기를 좋아하고, 언론 역시 언제나 틈새로 본 작은 일을 과장해서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것들은 만화경의 한 면일 뿐이다.

- 스타라는 것은, 사실 만화경의 한 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한 면만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경우, 아마 스트레스가 대단히 클 듯 한데, 스트레스가 심할 땐, 어떻게 해소하나요?
  그렇다, 자신을 풀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여행을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는데, 최근에 나는 온천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 당신의 경우엔, 일반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을 이미 모두 가졌다. 지위·명예·돈·잘생긴 외모·사람을 끄는 매력...........만일 아직도 어떤 것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한 후에)아마도, 학력이 아닐까? 학업은 대학중도에 그만뒀기 때문이다. 그때 열심히 공부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가능하다면 박사과정까지 공부해보고 싶다. 학생일 때 배울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많다.

영화배우로서...


- 자신이 연기한 영화에 대해서, 여러 번 보기를 좋아하는 편에 속하나요? 아니면 그다지 보지 않는 편인가요?
  음, 아마도 보지 않은 편에 속할 것이다. 다시 볼 경우, '음, 저 장면은 안 좋아''저 장면은 이렇게 연기했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아주 신경 쓰인다. 연기를 할 때에는 깊이 몰입하며, 시간이 없고 정력적으로, 나아가 객관적으로 보고, 단숨에 연기를 끝내고, 이후에 다시 볼 때, 제 3자의 눈으로 보면, 소홀했던 부분은 쉽게 눈에 띄이지만, 좀 생각해보고, 후회해봤자 이미 바꿀 방법이 없다. 정상적인 심리각도에서 보면 또한 나쁘다.

- 지금까지 연기한 배역 중에, '이 역은 완벽하게 해냈다'라는 것이 있었나요?
  (정말 망설이지도 않고)없다. 모든 영화를, 후에 다시 볼 때는, '만일 지금 다시 한다면, 훨씬 더 잘 연기할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 이전의 영화와 비교해서, 당신의 연기는 확실히 성숙되었는데, 특별히 애정영화에서의 진보가 크다, 이것은 경험의 축적 때문인가요? 아니면 고심해서 연구한 결과인가?
  뭐라고? 애정영화 진보가 크다고?(하하^__^) 만일 그렇다면, 당연히 개인의 경험도 반드시 도움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화면의 끊임없는 연출과정 중, 점점 진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기는 은행의 통장과 같아서, 끊임없이 돈을 은행에 저금해야만, 일정한 시간까지 수확의 계절을 기다려야 한다. 오이가 익으면 꼭지는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고, 물이 흐르는 곳에 도랑이 생기는 법이다(조건이 성숙되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은 일찍이, 어떤 사람은 늦게, 어떤 사람은 평생을 쓰고도 진보가 크지 않다. 당연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감독을 만나는 등의 많은 요소들이 필수적이다.

- 애정영화뿐만 아니라, 스크린으로 보여지는 당신의 뒷모습·손동작·발동작 하나하나 모두 당신만의 독특한 일면이 있다, 설사 하나의 윤곽만이라도 당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러한 모습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인가요? 아니면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인가요?
  결코 특별히 의식했던 적은 없다. 매우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다. 나는 연기에 무슨 방법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코 의식해서 무언가를 연기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 하나의 장면에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을 했을 뿐이다. 주인공이 되어서는 그에 맞는 동작들을 했을 뿐이다. 어떤 연기자는 자신의 가장 알맞는 촬영각도는 45도라는 등등, 이런 식으로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표정이나, 동작 등을 연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평소에 자신이 하는 행동으로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나, NG가 나서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을 때는,  다양한 방법으로 연기변화를 시도한다. 이렇게 할 경우, 연기에 조금의 변화가 생기더라도 배우의 연기만 좋다면, 감독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자르기가 아깝지 않겠나?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이 보는 장면은 정말로 좋은 장면들로만 구성된 것들이다.

- 그러나, 어떻게 말하더라도 좋은 연기자와 그렇지 않은 연기자의 연기는 다릅니다.
  당연하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연기자 혹은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연기자는 그들의 연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연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독특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 않아야, 자신만의 설득력이 생긴다. 전자와 비교해서, 중간수준의 연기자, 바로 타고난 재능이 없는 보통수준의 연기자는 어떤 연기를 해도 별 차이가 없고, 관중들로 하여금 그 배역의 진면목을 느끼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큰 도전을 하길 원하지 않는다.

- 당신은 현재까지 많은 여자배우와 연기를 해왔는데, 여자 연기자의 나이는 점점 젊어져 갔는데, 당신에게는 줄곧 어떤 변화도 없었는데요. 그러나 실제로는 나이가 점점 들어가서, 여자 배우와의 세대 차이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나요?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_^ 사실을 말하자면 최근에 함께 공연한 것은 공연이라기보다는 마침 학생을 가르친다는 느낌이었다. 촬영장에서는 완전히 선생님이 된다.^_^ 그러나, 비록 세대차를 느끼기는 하지만, 나는 실제나이보다 어려보이기 때문에, 만약 같은 나이또래의 여자배우와 같이 연기를 한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도리가 없다.

주연을 맡은 영화에 관하여...

- 당신이 주연했던 영화에 관해서 묻겠는데요, 먼저, 지금까지 가장 연기하기 어려웠던 배역은 무엇이었나요?
  (잠시 생각한 후)<春光乍泄>의 何寶榮이다. 그 영화를 찍을 때의 내 몸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또 콘서트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스케줄이 매우 빡빡했다. 王家衛감독은 대본의 촬영방법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주위의 모든 상황에는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특별히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하던 간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何寶榮, 이 사람을 어떻게 연기해야 비로소 강한 매력을 얻을 수 있는지 그 당시의 나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黎耀輝 역은 의외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심리적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何寶榮은 실제 어떠한 공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연기가 나쁠 경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역겨움을 느끼게 할 만한 배역이었다. 설사 이 배역을 연기한다 하더라도 관중들의 눈 속에 도대체 어떤 인상을 남긴다 말인가? 정말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 그러나, 당시은 이 何寶榮이라는 배역을 성공적으로 이뤄냈고, 홍콩영화금상장과 대만금마장시상식에서 최우수남우주연상후보에 올랐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의외였다. <春光乍泄>에서 나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보에 지명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 <阿飛正傳>과 <東邪西毒>에서 연기한 배역에 대해서, 당신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상은 평론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 스스로 말할 수 없다. 만일 어떤 한 영화에 대해서 스스로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묻는다면, <覇王別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일본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

- <春光乍泄>의 아보영과 비교해서, <覇王別姬>의 蝶衣는 연기하기가 수월했나요?
  그렇다. 성격상으로도 좋았으며,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특별히 그의 예술과 사랑에 대한 집착은 매우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단지 북경어와 경극을 하는 데에 조금의 어려움이 있었다. 어쨌든 모두 잊기 어려운 기억을 남겨주었던 영화였다.

- <金枝玉葉>에서 묘사한 것은 연예계인데, 팬들은 주인공인 顧家明은 당신 자신을 연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다. 나는 작곡가도 아니고, 피아노도 칠 줄 모른다.(하하^_^) 확실하게 독신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다... 영화 속에서, 만일 비슷한 부분을 말하라면, 생활방식 ·인생관의 보수적인 면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는, 내 성격이 조금 나타나기는 했다.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반응은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이 아닌 거 같은가?

- 원래는 그랬군요. 그 장면은 당신의 실제상황이었군요. 그 공포감을 표현하는 그 장면은 정말 연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그러나, 당신과 이야기를 해보고 나니, 확실히 고가명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껴져요.
  아, 그런가? 조금 보태서 이야기하자면, 30%정도는 비슷하다. 사실, 내 생각엔 그 주인공은 나보다는 감독인 陳家辛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마침 陳家辛감독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는 감독에 관해서 질문을 하겠어요. 당신과 첸카이게감독은 <覇王別姬><風月>에서 같이 작품을 했는데, 내 생각에 그는 당신을 아주 알아주는 감독중의 한 사람인 거 같습니다.
  확실히 그는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風月>은 나를 주인공으로 결정한 후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작품이었다.

- 그의 <暗殺秦始皇>작품은, 처음에 당신이 주연하기로 되어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스케줄에 문제가 있었다. 그 영화는 1년여의 촬영시간을 요했지만, 나는 순회콘서트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다른 이유는 영화의 주인공은 중국인의 머리 속에서 크고 강한 이미지로 남겨져 있어서, 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 王家衛 감독과 徐剋 감독의 영화 중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연기하였는데, 이것은 두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당신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서인가요?
  역시 그들은 나의 다른 면들을 봤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영화 내용 역시 다르다. 王家衛감독의 영화는 독특하며 퇴폐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허무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의 영화가 시대·공간의 설정이 다르더라도 그가 묘사하는 세계는 그 한가지이다. 그러나, 徐剋감독의 영화는 일종의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비록 화면은 어둡지만, 결국은 어느 장면에서 희망과 광명이 담겨져 있다.  그들의 각 영화에서 이러한 구별들이 나의 배역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한다.

- 이번, 張之亮감독의 <流星語>촬영현장을 본 후에 놀란 것은, 당신은 감독과 영화에 대해 상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완전히 혼자 그 배역을 소화해냈다는 것인데요, 촬영 내내 줄곧 그랬나요?
  기본적으로 그렇다. 감독은 나의 연기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처음 작업하는 감독은 영화를 시작할 때 참을 수 없어한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배우들의 연기는 감독이 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촬영에 돌입하면, 그들은 곧 나의 연기를 인정하고, 또한 기본적으로 나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사고방식은 다르기 때문에, 나의 의견도 항상 감독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어떤 배역이건 매우 잘 돌입하고, 좋은 영화를 찍고 싶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감독과 의견이 일치한다.

- 연기방면에서 말한다면, 당신이 촬영할 때는 감독이 필요 없다는 건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감독이 필요 없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연기자는 제 1자의 입장에 있는 것이고, 제3자의 입장으로 연기를 봐줄 전문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감독이 존재하는 것이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당연히 감독과의 사이에서 의견차이가 생기긴 하지만, 이것 역시 좋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에서이다. 나는 한 사람의 연기자로서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좋은 감독들을 많이 만났으니... 오우삼, 첸카이케, 왕가위, 진가신, 장지량 등... 모두 매우 우수한 감독들이다. 그들은 나를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나는 어떤 것보다도 기쁘다. 본질적으로 좋은 영화가 되는냐 되지 않는냐는 감독에게 달려있다. 감독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나는 한 편의 영화는 보물이고 감독은 열쇠라고 생각한다. 보물을 여는냐 열지 않는냐는 완전히 감독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 목표는 감독이 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하여...

- 당신이 감독할 첫 번째 영화는 이미 준비하기 시작했나요?
  진행중이다. 빠르면 이번 봄(99년)에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 만약 감독으로서 여배우를 선택한다면, 어느 여배우를 선택할 건가요?
  莫文蔚나 舒淇이다. 莫文蔚는 재능이 있고 장래성이 있는 연기자이고, 舒淇는 미인일뿐만 아니라 성적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애정영화에 매우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배우 모두 장래성이 있는 배우이다.

- 당신의 팬들은 당신이 일단 감독을 시작한다면 다시는 배우로서 활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데요. 당신은 감독, 배우, 가수활동을 어떻게 할건가요?
  나는 가수활동을 자제할 생각이다. 음악활동은 조금 편안하게 할 생각인데,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앨범을 발매하지 않고 음악적인 영감이 떠오를 때,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노래를 부를 생각이다. 감독에 관해서는, 일단 시작하면 계속해서 감독에 전념할 생각이다. 그런 후에 적응이 되면, 나 스스로가 계속해서 배우로서 활동을 할 것인지 고려해 볼 생각이다. 순조롭게 된다면,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감독과 주연을 함께 할 수도 있다.

- 당신의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되는군요. 배우로서, 홍콩영화 외에, 이런 역할이라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영화가 있나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닉콜슨의 역할이다. 그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만, 마음은 매우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 역할을 내가 한다면, 정말 흥미로울 것이다.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다른 배역, 바로 매우 특이한 성격을 가진 동성애자 화가역은 어떤가요?(^_^)
  안 된다. 나는 그런 역할은 하고 싶지 않다.(^_^)

- 그럼 다시 말해서,  요청이 들어와도 거절하고 할 수 없는 역할은 어떤 것인가요?
  成龍의 역할이다.(^_^)

- 듣자하니, 당신은 다시는 코믹극에 출연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아니다. 코믹극의 율동적인 것을 나는 매우 좋아해서, 이후에 출연할 수도 있다. 만일 감독에 적응이 된다면, 내가 직접 코믹극을 찍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그럼, 마지막으로 내년에 열기로 계획되어 있는 뮤지컬<천녀유혼>에 관해서 말해주세요.
  나는 현재까지 무대 위에서 뮤지컬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매우 많다.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나를 매우 흥분시키고, 만일 성공한다면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희열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천녀유혼>을 선택한 것은 그것의 시각효과 때문이다. 뮤지컬은 청각과 시각이 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음악과 시각이 서로 보완할 수 있길 희망한다.

- 일본에서의 공연 계획은요?
  가능하다면 하고 싶다. 그러나 영화와는 달라서 자막이 없어, 언어상으로 큰 문제가 있다.

- 말은 이해 못해도 색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 꼭 일본에서 공연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기쁘다. 어떻든 간에, 나는 매우 훌륭한 뮤지컬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반드시 노력할 것이고, 당신도 와서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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