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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October 14, 2012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miuccia prada

prada official site
miumiu official site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1948.5.10~)는 194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프라다 창업주의 딸 루이사 프라다(Luisa Prada)와 해군이었던 아버지 루이지 비안키(Luigi Bianch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마리오 프라다는 1913년 ‘프라텔리 프라다(Fratelli Prada)’라는 가죽용품 회사를 창설하여 우수한 품질로 상류층 시장 공략에 성공하였다.
고가의 프라다 가죽제품은 한때 왕가에 납품할 정도로 뛰어난 품질과 디자인의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함께 인지도가 떨어지면서 사업이 난항에 처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마리오 프라다의 뒤를 이어 미우치아의 어머니와 이모가 경영을 맡았으나, 결국 1970년대 후반 회사는 파산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미우치아는 1977년 파산 위기에 놓인 프라다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수석 디자이너’로서 가업에 동참하였다.

지적 행동가이자 잠재적 예술가

미우치아는 가업에 동참할 당시, 밀라노 국립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 중에 있었다.
그녀가 대학을 진학할 1960년대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정치나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미우치아도 그런 학생들 중 하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정치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그녀는 1960년대 후반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원이자 이탈리아 여성 연맹의 회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중산층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옷을 사랑했던 미우치아는 공산당원임에도 불구하고 고가인 이브 생 로랑이나 앙드레 쿠레주의 의상을 착용하고 다녀 이목을 끌었다.
미우치아의 이런 아이러니한 모습은 여성 공산주의자 행진 때 기자들에게 포착, 신문을 통해 이탈리아 전역에 그 모습이 공개되어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미우치아는 바지보다 스커트를 좋아했는데, 이러한 점은 일반적인 여권 운동가들과는 반대되는 성향이었다.
미우치아의 전공과 공산당원이자 여권주의자라는 타이틀은 자칫 그녀를 극단적인 반항아로 몰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전공이나 사회활동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런 유행과도 같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실제 미우치아는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평범한 중산층 소녀로서,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대체로 평범하다 못해 지루한 학창생활을 보냈다.
그녀는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보다는 그 안에서 적응하는 방법을 찾아갔다.
몇몇 예로, 어릴 적 집에서 지켜야 했던 많은 규칙 중의 하나인 낮잠 시간에 미우미우(Miumiu)라는 가상 친구와 놀이를 했다거나,
부모님의 눈을 살짝 피해 밖에서 치마 밑단을 올려 미니스커트를 만들어 착용했던 발랄함을 들 수 있다.
그녀는 정치학도 출신으로서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이 많은 지적 여성이었음에 틀림없으나, 동시에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공상가이자 잠재적 예술가였다.
그녀의 이러한 일면은 오랜 팬터마임(pantomime: 무언극) 활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평생의 동업자이자 반려자와의 운명적인 만남

미우치아가 처음 프라다의 디자이너가 되었을 때, 그녀는 여러 가지 갈등에 직면하였다.
우선,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산물이라 여겨졌던 패션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공산주의와 여권 운동에 몸담았던 미우치아에게는 큰 자기 모순이었다.
또한, 본인이 원래 디자인 전공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열등의식에 시달려야 했으므로 오랜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는 그녀의 잠재적 재능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미우치아가 동업자이자 인생의 반려자인 파트리치오를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밀라노에서 열린 한 국제 피혁 박람회에서였다.
당시 미우치아는 프라다의 가방 디자인을 복제한 업체의 사장을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청년 실업가에게 설득당해 동업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청년 실업가가 바로 파트리치오였다. 2년 후 그들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1987년 결혼하였다.

이들은 함께 일을 시작하면서 커다란 시너지를 발휘하였고,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
사업에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파트리치오는 현실에 안주하려 했던 미우치아를 독려해 1980년 여성 신발 라인을 시작으로 1988년에는 여성복, 1993년에는 프라다 여성복의 세컨드 라인인 미우 미우(Miu Miu),
1994년에는 프라다 남성복, 1997년에는 언더웨어와 스포츠웨어를 순차적으로 출시하면서 승전고를 울렸다.
특히, 미우 미우는 미우치아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가상 친구이자 미우치아 자신이 되고 싶었던 이상적 분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미우치아의 이상적 자아가 입고 싶은 디자인을 좀 더 젊은 층을 타겟으로 제안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세계에 프라다 열풍을 일으킨 이들 커플은 이탈리아인으로는 처음으로 1994년 뉴욕에서 컬렉션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미우치아와 파트리치오는 2006년 <타임(Time)>지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커플 100위에 선정된 바 있다.

발상의 전환: 나일론 백의 탄생

미우치아가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렸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프라다 경영을 시작한 후 일을 배워갔던 한동안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품질 좋은 가죽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미우치아는 새로운 소재를 물색하게 되었고, 그때 그녀의 눈에 띈 것이 바로 기존의 가죽 트렁크 보호용 소재로 사용하였던 포코노(pocono)였다.
포코노는 조밀하게 제직한 나일론 방수 직물로 주로 낙하산이나 비옷을 포함한 군수품 제작에 사용되었다.
포코노는 가죽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질겨 실용적이었다.
미우치아는 1985년 이 포코노로 제작한 블랙 백팩을 출시하였다.
처음에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으나 곧 새로운 가방의 가치를 알아보는 소비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해서 패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꼽는 20세기 잇 백(it bag) 중의 하나인 프라다의 나일론 백이 탄생하였다.
가볍고 물에 젖지 않는 나일론 백은 정장이나 캐쥬얼 의상에 모두 잘 어울렸다.
또한, 디자인이 고급스러우면서도 학창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해 주어 나이든 여성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상품의 성공에는 프라다의 삼각형 금속 라벨이 부착된 나일론 백팩을 메고 두오모(Duomo) 광장을 돌아다닌 늘씬한 모델들의 역할도 컸다.
포코노는 다양한 가방 디자인은 물론 파카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프라다만의 패션 철학: 나쁜 취향과 지적 매력

2010년 Pre-fall 컬렉션에서 선보인 프라다의 밀리터리 룩. 프라다 컬렉션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밀리터리적 요소들은 연약한 여성성의 거부로 비춰진다.
미우치아가 처음 여성복 컬렉션을 발표했던 1988년과 1989년만 해도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녀는 두 해의 실패를 통해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보다는 프라다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1990년 드디어 전 세계에 프라다 열풍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녀는 프라다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기존의 미의 기준에 어긋나는 새로운 멋을 추구하였는데, 이러한 프라다의 스타일은 종종 ‘나쁜 취향’으로 묘사되었다.
프라다만의 나쁜 취향은 스커트에 발목 길이의 흰 양말과 하이힐의 매치, 털모자와 칵테일 드레스의 조합, 작업복에 티아라(tiara: 왕관)를 쓴 모습과 같이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병치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프라다의 스타일은 기존의 아름다운 여성복의 모습에 위배되는 것으로, 과거 여권 운동에 참여했던 미우치아의 정치적 관점이 담겨있다는 시각도 있다.
즉, 미우치아의 디자인을 아름답게 보여지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거부하는 반항적 상징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예가 프라다 여성복 컬렉션에 꾸준히 등장하는 밀리터리적인 요소이다.
미우치아는 밀리터리적인 요소를 도입해 연약한 여성의 모습을 거부하였다.

미우치아의 여성중심적 관점은 프라다의 디자인이 지향하는 단순함을 통한 편안함과 익숙함의 추구에서도 드러난다.
프라다의 나쁜 취향에는 보기에 아름다운 디자인 보다 활동하기에 편리한 착용자 중심의 디자인이 주를 이루는데,
이는 착용자인 여성을 보여지는 수동적 존재로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능동적 존재로 보는 미우치아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우치아는 여권주의적 관점 외에도 다양한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디자인으로 표현한다.
그녀의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은 중국의 마오쩌둥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져 디자인에 영감으로 작용한 바 있고,
언론 장악을 통해 세 번이나 총리가 된 이탈리아 최고의 갑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를 따분한 더블 재킷에 빗대어 풍자한 바 있다.

좌파적 성향과 보수적인 측면을 모두 가진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
 
미우치아는 이와 같이 사회적인 이슈와 관련해 좌파의 성향을 띠면서도 동시에 보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프라다가 추구하는 절제미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프라다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소리치기 보다는 조용히 속삭이기 때문이다’라는 미우치아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즉, 미우치아가 생각하는 매력이나 섹시함은 직접적인 노출이나 지나친 장식을 통해 표현하는 유혹이 아닌, 은근한 지적인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스타킹 대신 양말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추구하는 이러한 절제와 지성의 미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미우치아의 성장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보수적 성향을 지녔음에도 그녀는 다양한 예술계 자문위원의 조언을 통해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함은 물론, 매 시즌 새로운 컨셉과 신선한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프라다 재단의 예술 후원

미우치아와 파트리치오는 예술에 대한 조예가 남다르기로 유명하다.
이들은 1993년 프라다 밀라노 아르테(Prada Milano Arte)를 오픈하여 다양한 예술 전시를 유치했는데, 이는 좋은 사회적 호응을 얻어 2년 후 프라다 재단(Prada Foundaton)이란 이름으로 사업을 확장하기에 이른다.
프라다 재단은 예술 후원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으며, 신진 예술가들을 초대해 다양한 문화 공연을 선보이면서 밀라노의 예술 중심지화에 기여하고 있다.
한 예로 미우치아는 2005년 텍사스 사막 도시 마파(Marfa)에 프라다 모조 상점인 프라다 마파(Prada Marfa)를 세운 독일 예술가 미카엘 엘름그린(Michael Elmgree)과 엥가르 드래그셋(Ingar Dragset)에게 실제 진열을 위해 프라다 신발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프라다의 이러한 예술 후원은 기업 홍보를 위한 수단이라는 비난의 여론도 없지 않다.
그러나 미우치아는 프라다 재단의 전시나 공연을 기업 홍보에 직접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프라다와 아방가르드 건축

미우치아와 파트리치오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건축가를 영입한 본사와 매장 의 설계 및 건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밀라노에 있는 프라다 본사에는 4층에 위치한 미우치아의 사무실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유리와 강철로 된 구조물이 있는데,
이는 카르스텐 휠러(Carsten Holler)가 만든 ‘5번 슬라이드’라는 작품으로 미우치아와 손님들이 건물을 빠져나갈 때 실제 사용하고 있다.
또한, 프라다사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건축가이자 하바드 대학 교수인 렘 콜하스(Rem Koolhaas)와의 작업을 통해 2001년 뉴욕 소호에 첫 프라다 에피센터(epicenter)를 열었고,
이어 몇 년 후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도 그가 설계한 센터를 오픈하였다.
반면, 동경의 에피센터는 2003년 자크 헤어초크(Jacques Herzog)와 피에르 드 뫼른(Pierre de Meuron)에 의해 건축되었다.
건물 외관부터 상서롭지 않은 이 에피센터들은 방문자들이 쇼핑과 함께 전시나 공연을 통해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센터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프라다의 예술 후원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이 설계한 프라다 매장들에 대해서도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프라다가 지나치게 대중화되어 버린 기업 아이덴테티 재구축을 위해 이 전위적인 건축가들의 사회적 이미지를 교묘히 유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라다 에피센터는 많은 여행객들에게 재미와 휴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아울러 기업 매출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후 다른 명품 브랜드들도 프라다를 따라 유명한 건축가들에게 매장 건축을 의뢰하게 되었다.

또, 2009년 서울의 경희궁에는 프라다 트랜스포머(Prada Transformer)라는 높이 20m와 무게 180톤에 달하는 구조물이 들어섰다.
이 구조물은 프라다사의 요청에 따라 렘 콜하스가 디자인한 것으로, 육각형, 직사각형, 십자가, 원형이 조합된 형태인데,
네 개의 프로그램이 구조물 내부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될 때마다 구조물의 바닥, 천장, 벽의 위치가 바뀌면서 변형을 이루도록 기획되었다.
네 개의 프로그램 중의 첫 번째가 60벌의 프라다 스커트를 독특한 방식으로 디스플레이 한 ‘웨이스트 다운(Waist Down)’ 전시였다.
도쿄, 상하이, 뉴욕, 로스앤젤러스에서도 열렸던 웨이스트 다운 전시는 미우치아의 치마에 대한 애착과 함께 그녀의 독창적 디자인 세계를 잘 보여주었다.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 야심: X-프로젝트

프라다사는 1998년 세계적인 브랜드 합병을 통한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 계획인 X-프로젝트를 수립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 달성을 위해 1999년부터 프라다와 유사한 미니멀 이미지를 추구하는 브랜드인 헬무트 랭(Helmut Lang), 질 샌더(Jill Sander), 펜디(Fendi) 등을 합병하였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인해 세계 경제의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2002년 프라다는 16억 1720만 5000 유로라는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었다.
이에 2006년까지 일부 브랜드들을 처분하였고, 이후 프라다, 미우 미우와 함께, 영국 신발 브랜드인 처치스(Church’s)와 이태리 신발 브랜드인 카 슈(Car Shoe)만을 운영하고 있다.
프라다사는 2009년 세계에 프라다 174개, 미우 미우 53개, 처치스 34개, 카 슈 4개를 합쳐 총 265개의 매장을 확보하여 경영을 지속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de la Pena, C. T., [Ready-to-wear globalism: Mediating materials and Prada’s GPS], (Winterthur Porfolio, 38(2/3), 109-129, 2003); English, B., [Fashion: The 50 most influential fashion designers of all time.
Hauppauge], (NY: Barron’s, 2009); Paracchini, G. L., [The Prada life: A biography], (Italy: B.C.Dalai editore, 2009); Polan, B., & Tredre R., [The great fashion designers], (Oxford: Berg., 2009); Progetto Prada Arte., [Waist down: Skirts by Miuccia Prada], (Milan, Italy: Progetto Prada Arte SRL., 2006); Rock, M., [Prada], (Milan, Italy: Progetto Prada Arte, 2009); Ryan, N., [Prada and the art of patronage], (Fashion Theory, 11(1), 7-24, 2007); Stegemeyer, A., [Who’s who in fashion (4th ed.)], (New York: Fairchild, 2004).



글 이예영 / 고려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의류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였으며, 미국 Iowa State University에서 의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출처: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9686&category_type=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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