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24, 2012
오우삼(吳宇森, John Woo)
오우삼(吳宇森, John Woo : 1946 - )
우리는 '홍콩'이란 지명을 떠올릴 때 과연 무슨 생각부터 하게 될까?
중화요리, 중국, 아편전쟁 등등 많은 것들이 떠오를 수 있겠지만 내가 중학교에서 고등학생이 되어가던 시기의 홍콩이란 <영웅본색> 혹은 <천녀유혼>과 동의어였고,
이 시기의 시네마 키드들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나의 많은 친구들이 <영웅본색>을 통해 그들이 서 있는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을 해석했고,
동네 싸구려 삼류 극장에서 <영웅본색>은 컬트영화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듣기에 따라 오우삼의 아우라(aura)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주윤발이 내뱉는 대사들은 겉멋에 찌든 신파조 대사들이었으나
그 시기의 우리들에게 그의 대사 하나하나는 죽음을 앞둔 무사의 허무하고 비장미 넘치는 한 마디였다.
지폐로 담뱃불을 붙이고 총탄 무제한의 쌍권총을 난사하며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이 낯선 홍콩 배우 '소마'
주윤발에게 매료된 당시 젊은 관객들은 <영웅본색>을 반복 숙독해야할 교본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들은 그를 따라 너나 할 것 없이 짙은 색의 롱코트를 걸쳤다.
하긴 우리들에게 80년대 이후의 아해(?)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신파조 대사들에 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는 하다
중학 시절부터 눈뜨면 반복되는 최루탄 냄새 속에 등교하였고,
혹 하교 후 사복 차림으로 동네 한 바퀴 산보라도 하려면 몇 차례씩 반복되는 전경들의 불심검문에 멈춰서야 했으며
점거농성이란 말이 피부에 와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바로 눈앞에서 친구와 선배들이 불길에 휩싸여 죽어가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영웅본색>의 세계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변혁이자 체질적으로 양지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도 조금만 주의깊은 사람이라면 지금 이 시기에도 <영웅본색>의 그 어두움은 우리 사회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우삼은 하워드 혹스(Howard Hawks: 대표작 <스카페이스(Scarface)>1932년 작으로 고다르는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를 <스카페이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만들었고,
브라이언 드 팔머는 83년 알 파치노를 주연으로 <스카페이스>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대표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및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유명한 감독),
샘 페킨파(Sam Peckinpah: 대표작 <와일드 번치(The Wild Bunch)> 폭력미학의 대부)로 이어지는 액션 장르 영화의 작가주의 계보를 잇는 감독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미켈란젤로가 천정화를 그린다면 오우삼은 액션을 연출한다' 고 말했으며,
그에게서 영화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평가로 쿠엔틴 타란티노는 오우삼에게서 코스츔만을 배워왔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오우삼이 짊어진 동양적 정서는 배제한 채 일종의 율동만을 배워온 셈이다.)
오우삼의 생애를 통해 본 홍콩 느와르의 여명
오우삼은 1946년 중국 광둥성의 광저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이 부유한 집안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의 일가족은 공산화된 중국을 떠나 1951년 홍콩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월남민인 셈이다.
본토를 떠나 당시로서는 사회주의 중국의 한 귀퉁이에 자본주의의 섬으로 남게 된 홍콩에서의 오우삼 가족은 너무나 가난해서 낡은 오두막집을 전전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1953년 대화재로 오두막마저 불타버려 그후 몇 년간을 거리에서 집 없는 노숙자로 살아야만 했다.
철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10년 동안 투병 중이었고 오우삼의 어머니가 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우삼은 어린 시절을 폭력과 마약, 매춘이 만연된 빈민가에서 보내게 된다.
오우삼은 자라면서 깡패들의 패싸움이나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대결을 가까이에서 접했다.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지옥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들었죠.”
독실한 루터 교도였던 그의 가족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교회는 나의 은둔지였고 부모님은 나의 수호신이셨습니다.”
그의 가족은 교회를 통해 어느 미국 가정의 도움을 받게 되어 소년 오우삼은 이 가정의 도움으로 8년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오우삼은 한때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으나 신부가 되기에는 너무 예술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다.(이점은 마틴 스콜시지 감독과도 흡사하다.)
그는 미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루터교 학교에 다녔는데, 이 때문에 그는 제임스 딘(James Dean),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등의 미국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당연히 그것들에 매료된다.
오우삼이 홍콩에서 제작한 느와르풍의 영화들에서 성당 장면이 나오는 까닭도 그가 어린 시절 교육받았던 미션 스쿨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우삼의 어머니는 대단한 영화광이어서 아들인 오우삼을 데리고 거의 매일 영화를 보러다녔다.
그녀는 특히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과 캐리 그랜트(Cary Grant)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오우삼 역시 영화를 매우 좋아했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영화들은 진 켈리(Gene Kelly)나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가 나오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같은 뮤지컬 영화나 프랑스 영화들이었는데
(이런 점들은 그의 후배 감독 왕가위의 삶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왕가위는 "홍콩에 이주한 아버지는 나이트클럽 매니저로 일하셨다. 이 나이트클럽은 <중경삼림>에 나오는 중경빌딩 지하에 있었다.
어머니는 영화광이어서 어머니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두세 편씩 영화를 보았다. 아버지는 또 문학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았기 때문에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면서
"젊었을 때는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뒷골목의 술집들을 많이 다녔다"고 설명했다.)
그가 특히 뮤지컬 영화들에 심취하게 된 데에는 이 영화들이 비참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인데,
대공황 시기 미국에서 많이 제작된 영화가 뮤지컬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미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곳을 상상했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는 곳이었는데, 바로 뮤지컬에서 그런 곳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하고 선량한 곳이었습니다.”
<페이스 오프(Face Off, 1997)>에 삽입된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는 그가 본 첫번째 본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의 주제곡이었다.
그가 이런 뮤지컬의 세계를 꿈꾼 것은 동시에 그의 삶이 신산했다는 것과 그가 다분히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두고 홍콩 영화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데 그것은 홍콩을 떠나는 부류와 홍콩에 그대로 남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우삼은 당연히 홍콩을 떠나고자 했다.
공산주의를 피해 홍콩으로 온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고, 그가 받았던 미션스쿨 계열의 학업들이 그의 이런 판단을 더욱 확고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들은 그의 영화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를테면 그에게 있어 홍콩은 중국의 것도, 영국의 것도 아닌 홍콩 사람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파크의 홍콩 야경을 바라보며 영화에서 아성 일당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 주윤발이 송자호에게 치료받으며 '아름답군... 이대로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읊조리는 부분은 홍콩 반환을 앞둔 오우삼의 대사였을 것이다.
오우삼은 16세 무렵의 청소년기에 학교 공부보다는 영화와 예술에 빠져 도서관, 박물관, 영화관을 전전했다.
고등학생 때에는 연극을 연출해보고 직접 연기도 하는 등 점점 더 영화에 몰입했지만 철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란 가공의 것이며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철학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결심을 꺾지 못하자 그는 이런 말을 오우삼에게 남겼다고 한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하지만, 정도(正道)를 걷고 기품 있게 살아야한다."
오우삼의 영화 입문과 작품세계의 바탕
오우삼이 본격적으로 영화를 배우려 했던 1960년대 홍콩에는 영화학교가 없었다.
게다가 부친의 죽은 뒤로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일자리를 구해야했다.
그는 <Chinese Student Weekly>라는 신문사에 취직하여 시, 미술, 철학 등 몇 가지 분과로 나뉘어진 모임을 갖게 되고 그는 이 모임에서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분석하면서 지식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오우삼과 그의 친구들은 유럽영화, 일본의 예술영화, 실험영화들을 좋아했지만 1970년대부터 유럽영화는 몰락해갔고, 대신에 미국영화가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오우삼은 그의 평생 스승이라 할 수도 있는 샘 페킨파, 프란시스 코폴라,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과 같은 감독들의 영화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스탠리 큐브릭은 오우삼과 그의 친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감독이었는데, 오우삼은 그 중에서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이라고 말한다.
오우삼 작품 세계에서 풍기는 동양적 비장미는 그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소설을 좋아했고 당시의 유행철학이던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탓이 크다.
또한 그의 청년기를 사로잡았던 당대의 현실이 그것인데,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의 홍콩은 다른 어떤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격동의 시기였다.
공산당원과 국민당원의 충돌로 촉발된 두 번의 대규모 시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갱들의 세력다툼도 그 어느때보다 치열했다.
오우삼은 당시를 회상하며 "히피에 가까웠다고나 할까요. 제가 살고 있는 사회와 전쟁에 관해 항상 고민했고 반전시위에도 참여해봤으니까요."라고 말한다.
그런 지적인 풍토에서 성장한 오우삼과 그의 그룹은 당시의 홍콩영화계(이 무렵의 홍콩영화들은 당시 우리의 영화보다 수준이 낮았다.)를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여러 잡지에 기고하며 홍콩 영화계에 여러 적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그의 글들은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앙드레 바쟁이나 트뢰포 등이 비교적 쉽게 영화계에 입문한 프랑스적 풍토와 비교해보면 더욱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항상 자신들이 홍콩영화계를 송두리째 뒤바꿔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친구들 중에서 지금까지 영화계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오우삼을 비롯해 몇 명되지 않는다.
오우삼이 홍콩영화를 송두리째 바꾼 것은 어쨌든 맞는 장담이었다.
오우삼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히어로들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 오우삼은 영화클럽의 회원으로서 몇편의 단편영화들을 찍지만 급료는 형편없었고 단지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 대본검토인(script-supervisor) 자격으로 캐세이 스튜디오(Cathay Studio)에 처음으로 취직하게 된다.
1971년 그는 캐세이 스튜디오를 떠나 홍콩에서 가장 큰 영화사였던 쇼브라더스 영화사(Shaw Brothers Film Company)로 이적하는데
오우삼은 그곳에서 당시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던 장철(張徹, Chang Cheh)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수호전>(水滸傳, 1971), <마영정>(馬永貞, 1972), <사기사>(四騎士, 1972), <자마>(刺馬, 1973) 등의 영화에 참여한다.
샘 페킨파가 같은 이들이 상상 속의 스승이라면 오우삼이 존경해마지않는 감독 장철은 그의 현실의 스승이었다.
장철 감독은 뛰어난 무협영화들을 만들어 홍콩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1960년대 초 홍콩에는 여성들간의 유대감을 다룬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지만 장철은 그와는 반대로 남성들간의 신뢰와 우정을 다룬 영화를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이전의 홍콩영화는 주연 여배우들만이 인기있었을 뿐, 남자배우들은 조연에 불과했다)
그가 만든 액션영화들은 홍콩영화인들로부터 샘 페킨파의 작품들처럼 리얼리티가 뛰어나면서도 홍콩 액션영화의 테크닉과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는 적룡(狄龍), 왕우(王羽), 이수현(李修賢) 등은 모두 장철의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배우들이다.
오우삼은 1년 반 정도 장철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촬영, 편집, 사운드 더빙 등 많은 것을 직접 해볼 수 있었고, 특히 편집작업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는 지금도 젊은 후배들에게 감독일을 하고 싶다면 먼저 편집을 배울 것을 권한다고 한다.
그러나 오우삼이 장철에게 배운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서양인 감독에게서 배울 수 없는 동양인만의 정서를 작품에 녹아들게 하는 것이었다.
장철의 무협영화 전편에 흐르는 우정과 의리, 명예에 대한 것은 그대로 살리며 오우삼은 칼 대신에 총을 들게 한다.
그가 자신의 갱스터 영화들을 "총을 든 무협영화"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다만 오우삼의 영화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은 서구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그런 골빈 액션 히어로들이 아니라 풍부한 감정과 의협심을 가진 인물들이었다는 점이 이전의 중국영화들과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오우삼은 "영화 속에 우리 자신을 좀더 많이 대입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성룡에게 최초의 주연직을 맡긴 감독이 바로 오우삼이었다.)
오우삼의 작품 스타일은 무제한의 쌍권총 난사만이 아니다.
지금은 개나 소나 다 사용하는 슬로우 모션이지만 오우삼이 처음 등장하던 당시의 슬로우 모션 장면은 정말 잘 짜여진 한 편의 경극을 보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오우삼의 영화가 바로 그렇다.
오우삼의 영화에는 클리셰(Cliche: 영화 속에 반복되고 있는 생각이나 문구, 영화적 트릭)라 불리는 장면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슬로 모션이나 고속촬영, 쌍권총을 난사하는 주인공, 그림자로 상대방의 위치를 알게 되는 상황설정,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두 남자,
총을 공중으로 던져주는 장면, 플래시백으로 과거의 액션을 보여주는 장면, 경극과 버금가는 동작 그리고 장중한 음악 등을 꼽을 수 있다.
'액션 미학'이라고까지 불리는 화려한 액션 신과 그 밑바탕에 깔린 허무주의가 어우러진 오우삼의 영화에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있다.
1973년, 오우삼은 영화산업에 투자하고 싶어 하던 친구를 위해 <철한유정(鐵漢柔情)>을 제작하게 된다.
오우삼의 작품 스타일의 맹아는 사실상 <철한유정>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내용은 청일전쟁 당시 무기밀매를 하던 갱들간의 치열한 세력다툼이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오우삼은 <철한유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원래는 약간 센티멘탈한 쿵푸영화를 계획했어요.
저예산영화였고 그럭저럭 괜찮은 배우들이긴 했지만 사실 캐스팅도 별로였죠.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그 영화 괜찮다고 말해줬는데, 불행하게도 홍콩에서는 상영이 금지됐습니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이유였어요. 사장이었던 내 친구는 완전히 돈을 날릴 뻔 했죠.
그래서 그 친구는 그 영화를 골든하베스트에 팔았는데 뜻밖에도 영화사측에서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했어요. 그래서 저랑 계약이 된 겁니다."
그는 겨우 27세의 나이로 홍콩에서 가장 젊은 영화감독이 되었다.
당시 홍콩의 감독들은 대부분 적어도 45세 이상이었고, 그들도 최소 15년간은 조감독 생활을 거친 사람들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겨우 1년 반 동안만 조감독 생활을 했던
오우삼을 못미더워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골든하베스트에 소속되어 1977년까지 쿵푸영화를 주로 찍는다.
1977년 오우삼은 허관영(許冠英)와 함께 그의 첫 코미디물 <발전한(發錢寒)>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는다.
이 영화 이후로 오우삼은 주로 코미디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맡게 된다.
그러나 잇따른 그의 이런 외도는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하고 시들해지며 오우삼 역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웅본색>, 신화가 되다. - 길을 잘못 들어선 지난 세기의 영웅들
하지만, 1986년 서극(徐克)이 제작을 맡고 그가 감독한 <영웅본색(英雄本色)>이 모든 것을 바꿔놓게 된다.
예전에 오우삼은 젊은 영화인들을 도와주곤 했는데, 서극 역시 그때 오우삼에게 도움을 받은 후배였다.
몇 편의 실험성 짙은 영화로 주목받던 서극이 골든하베스트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데에는 오우삼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류제작자 겸 감독으로 유명해진 서극이 같은 방법으로 오우삼을 도와준다.
서극의 도움으로 다시 골든하베스트와 계약할 수 있게 된 오우삼은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프로젝트 <영웅본색>의 제작을 서극에게 맡기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홍콩느와르", 서양에서는 "Heroic Bloodshed"라고 알려진 독특한 홍콩 갱스터영화들의 효시가 된 <영웅본색>은 전통적인 무협물의
스토리에 누벨바그(nouvelle vague)적 요소(서로 대립되는 캐릭터의 설정은 그 한 예입니다)와 샘 페킨파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현란한 폭력 등을 결합해 만든 영화였다.
<영웅본색>은 1986년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주윤발(周潤發), 장국영(張國榮), 적룡(狄龍) 등 출연배우들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오우삼에게 가장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자칫 평범한 무협, 코미디 영화감독으로 사라질 뻔한 그를 자신의 세계관이 있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평가받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7년, <영웅본색 2>의 촬영 도중, 오우삼과 서극의 관계가 벌어져 서극은 더이상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에 오우삼을 쓰지 않기로 하고,
오우삼이 제출한 <영웅본색 3>, <종횡사해> 프로젝트를 연거푸 반려하고, 베트남을 무대로 하겠다는 오우삼의 <영웅본색 3> 컨셉트을 이용해 서극 스스로 <영웅본색 3>의 감독을 맡는다.
결국 오우삼은 자신이 계획했던 <영웅본색 3>의 컨셉트를 수정·보완해 <첩혈가두, 1990)를 찍게 된다.
<영웅본색>에서 스턴트맨으로 일했던 당계례(<폴리스 스토리 3 / 수퍼캅>) 감독은 말한다.
“중국인에게는 네 개의 덕목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충(忠)’으로 충성심이고, 두 번째는 ‘효(孝)’, 즉 부모님에게 잘해드리는 겁니다.
‘인(仁)’은 타인들에게 잘해주는 것,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에게도 용서를 베푸는 것이고, 마지막이 ‘의(義)’로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자세입니다.”
<영웅본색>은 홍콩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며 오우삼과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주윤발의 주가를 폭등시켰지만 오우삼은 서극과 결별하고 마일스톤을 설립하였다.
원래 <영웅본색>의 전편으로 기획된 <첩혈가두>는 중국 천안문 사태 이후 또 다른 의미가 가중되었다.
홍콩 슬럼가의 세 친구가 베트남 전쟁에 휩쓸리게 되는 이야기인 이 영화의 촬영중 발생했던 천안문 대학살은 오우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거의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너무 개인적이게 되었죠. 그래도 난 그 영화를 좋아합니다.”
독특한 슬로우 모션의 미학과 '영웅과 우정, 배신과 신화'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속에는 1997년 홍콩 반환에 대한 강박관념이 배어 있다. 특히 <영웅본색>이 가족과 친구라는 도의의 원형으로부터 출발한 내러티브를 가진데 비해
<첩혈쌍웅> 은 정반대의 입장을 지닌 두 영웅이 서로의 영웅적 면모(명예심)를 통해 매혹되어 교감에 이른다는 내용으로 유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며,
자신의 페르소나 주윤발을 통해 영웅적 낭만성을 재현하며, 액션 연출에서도 오우삼 미학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그가 젊은 시절 탐독한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실도 잊지 말자)
<첩혈가두>는 청년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가득차 있는 오우삼의 자서전 같은 영화이다.
오우삼은 1967년 베트남이라는 배경을 천안문사태와 1997년 반환 이후의 홍콩의 사회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며 배신과 의리 속에서 홍콩의 미래를 불안하게 지켜본다.
서극과 완전히 결별하기 전, 오우삼은 <영웅본색> 1, 2편의 대히트 이후에 이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했다.
이 프로젝트 역시 회사로부터 거절당했지만, 오우삼이 주연으로 캐스팅하고자 했던 주윤발이 그 역을 강력히 희망했고, 회사측에서도 대스타가 된 주윤발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가까스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결국 영화사의 간섭으로 오우삼의 원래 의도와는 약간 다르게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가 바로 오우삼 불후의 명작 <첩혈쌍웅>이었다.
오우삼이 홍콩에서 만든 마지막 영화인 <첩혈속집>의 도입부에는 의미 심장한 대사가 등장한다.
그의 영화를 통해 가장 과격한 액션이 펼쳐지는 부분에 앞서 주윤발은 동료에게 묻는다.
“자네는 이민 갈 생각은 없나?”또 한 작품 주목할 만한 것은 <화평본위(홍콩 개봉당시엔 和平飯店이었고 국내에서는 화평본위 和平本位 Peace Hotel)>인데
그가 아끼는 배우 주윤발이 홍콩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출연한 이 영화를 위해 미국에 가있던 오우삼이 돌아와 제작 지휘를 맡았던 영화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97년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다.
오우삼이 홍콩에 남긴 마지막 한 마디
1997년 홍콩 사람들에게 이 해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한 해였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치욕적인 아편전쟁이 끝나고 베이징 조약으로 홍콩 즉 구룡반도가 제국 열강(영국)의 손에 100년간 할양되었던 그 해(1897년)의 100년째 되는 해라는 사실 뿐 아니라
이런 별스런 경험의 종착역에 도착해 영국의 홍콩령 중국계 영국인에서 중국인으로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섬 아닌 섬에 갇힌 사람에서 본토의 일부분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본위Peace Hotel>는그러니까 중국이 제국 열강의 손에 함부로 짓밟힐 무렵 - 이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脫歷史性의 역사성'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느낌 - 주윤발은 마적단의 두목이었지만 지금은 은퇴하여 개인적인 비밀에 휩싸여 있는 여관 주인으로 살고 있다.
이 여관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범죄자이던 세금쟁이에게 쫓겨 달아난 사람이든 간에 가리지 않고 모두 감춰주는 곳이다.
이 여관의 입구에는 마치 중국식 서부극의 향수라도 되는 양 <O.K 목장의 결투>에나 나올 법한 목재 문이 서있고,
그 문의 경계에는 역시 <엑스칼리버>에 나올법한 바위에 검이 하나 꽂혀있다.
이 검, 즉 주윤발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DMZ가 형성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주윤발은 어색한 시대에 이상한 단독강화를 취하며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이 공간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이 여관에 그 정체가 모호한 한 여인이 도망해 들어온다.
이 여자는 주윤발의 전 부인인인 척 행세를 하지만 곧 들통이 나고 쫓겨날 처지에 처한다.
그 때 들이닥치는 마적떼는 그 여인을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부두목을 죽이고 도망친 여자라는 것이다.
...........<중간 생략>..........
그러나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상투적이고, 작위적이며 동시에 개연성이 없는 여러 요소들로 가득찬 쓰레기같은 영화이다.
가령, 주윤발은 마적떼에게 함부로 등을 보인다.
총을 가진 마적떼가 마음만 먹는다면 집중사격으로 주윤발은 벌집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의 기세에 눌려 못 그럴 수도 있지만 - 영화에서는 주윤발이 이렇게 행동할 때, 그의 발 아래 모래 먼지가 인다. - 어쩐지 우습다.
그리고 싸움에 들어섰을 때 그는 주먹으로 싸우거나 칼로 싸운다. 마적들도 총은 두고 육박전을 벌이다니, 지나친 코스츔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후반부에 돌입하면 이 여관의 손님들은 모두 제 살 궁리만 하느라 바쁘다.
마적 떼에게 완전히 포위된 채 대학살이냐 아니면 잠정적으로 주어진 시간 내의 항복을 겸한 탈출이냐를 두고 이 여관의 사람들은 說往說來하기 마련이다.
결국 이 여관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지켜주던 주윤발을 버리고 탈출한다.
마적떼의 두목은 한때 주윤발의 부하였다가 주윤발이 아내의 죽음을 미연에 막지 못한 자책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함부로 죽일 때 살아남은 단 한 명의 부하였다.
그러니 마적이 이들을 곱게 보내줄리 만무하다. 마적떼의 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간신히 여관으로 되돌아온 사람들은 주윤발의 보호아래 함께 마적떼와 사투를 벌이고 주윤발은 死神이란 별명답게 마적떼를 쓸어버리고 최후에는 마적단 두목까지 해치운다.
그러나 주윤발은 그 와중에 깊은 상처를 입고 끝내 숨을 거둔다.
주윤발이 평소 아끼던 한 꼬마는 살아남아 주윤발을 회고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잃은 세대. 고난 앞에 처한 돼지 삼형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전설처럼 떠도는 주윤발의 이야기를 풍문으로 듣는다.
'그렇게 죽어 떠나는 모습을 본 우리들 조차 몇년 후, 그가 살아서 어디에 나타났더라'는 말을 하게 된다..라고,
이 영화는 홍콩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는 땅과 사람들에 대한 암시인 것이다.
오우삼의 헐리우드 진출과 거듭되는 실패, 그리고 그의 의미
헐리우드 밖 영화인들에게 헐리우드는 뛰어넘어야 할 아성이다.
정해진 내러티브와 캐릭터, 권선징악적 메시지, 가공할만한 세계 배급력을 갖춘 헐리우드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버티고 서있다.
(오죽하면 영화에서 공룡이 강아지를 집어 삼키는 장면이 나오자 관객들이 박수를 쳤겠는가! 어떠한 상황에서 애완견은 죽지 않는다는 헐리우드의 불문율이 깨진 것이다.)
그러나 할리우드를 넘어서고 싶어하는 많은 영화인들은 실상 할리우드에 빚지고 있다.
아무리 비난받고 도전받아도 함락되지 않는 성체 헐리우드는 아메바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그들은 제3세계의 영화인들을 수입하여 사용하고 버린다.
홍콩에서 할리우드로 공간 이동한 오우삼은 헐리우드 입장에서 보자면 흔한 용병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우삼의 헐리우드 진출은 여느 용병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믿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오우삼의 헐리우드 진출을 성공적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거듭되는 실패의 연속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그가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일련의 영화 중 흥행에는 비록 성공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으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진정한 오우삼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드 타겟(Hard Target, 1993)>, 존 트래볼타(John Travolta), 크리스찬 슬레이터(Christian Slater)주연의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1995)>,
존 트래볼타, 니콜라스 케이지(Nicholas Cage)가 주연한 그의 세 번째 할리우드 영화 <페이스 오프(Face Off,1997)>, <종횡사해>의 TV판 리메이크 <오우삼의 신종횡사해(원제 John Woo's Once A Thief, 1996)>,
돌프 룬드그렌(Dolph Lundgren) 주연의 또 다른 TV 씨리즈 <블랙잭(Black Jack, 1998)>, 주윤발의 할리우드 데뷔작 <리플레이스먼트 킬러(The Replacement Killers, 1998)>,
호나우도를 비롯한 브라질 축구대표팀을 모델로 한 나이키(Nike)사 CF 등 <미션 임파서블Ⅱ, 2000> 등 그가 헐리우드에서 환영받는 감독임에도 틀림이 없지만
데이비드 퍼트냄이 그러했듯이 헐리우드는 외국 유명 영화 감독들의 무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오우삼의 영화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겉멋"에 사로잡혀있으며 폭력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우삼의 진정한 가치는 그런 겉멋조차도 소외된 인간의 품성으로 소화해낼 수 있었던 역량에 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은 분명 안티 히어로의 이미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서구 영화에 등장하는 수퍼 히어로도 아니다.
오우삼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은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그들만의 품격이 있다.
거기에는 빛나는 홍콩의 야경이 상징하는 자본의 홍수 속에서 가난과 소외, 그리고 '홍콩이란 뇌관이 제거된 시한도시(時限都市)'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이 녹아있다.
그는 <영웅본색> 연작들과 <첩혈쌍웅>으로 소위 "홍콩느와르"(-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말이다.) 붐을 몰고 온 역량있는 액션감독이자
동양인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그것도 자신의 아우라를 대변할 수 있는 배우를 동행한 채 헐리우드로 스카웃 되어
전세계를 상대로 한 영화를 찍게 된 최초의 감독이란 것이다.
예전에 문학평론가. 김현은 홍콩 느와르 영화를 일컬어 '고민이 없는 영화'라고 혹평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것이 김현의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평가라고 생각한다. 제국의 변방에서 살면서 제1세계의 인식을 내면화한 변경 지식인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오우삼의 필모그라피
1973 철한유정鐵漢柔情(The Young Dragons)
1975 여자태권군영회女子跆拳群英會 (Belles Of Taekwando)
1976 소림문少林門(Countdown In Kung Fu)
제녀화帝女花(Princess Chang Ping)
1977 발전한發錢寒(Money Crazy)
대살성여소매두大煞星與小妹頭 (Follow The Star)
1978 호협豪俠(Last Hurrah For Chivalry)
합야부인 哈夜婦人 (Hello, Late Homecomers)
1979 전작괴 錢作怪 (From Riches To Rags)
1981 활계시대 滑稽時代 (Laughing Times)
1982 마등천사 摩登天師 (To Hell With The Devil)
팔채림아진 八彩林亞珍 (Plain Jane To The Rescue)
1984 소장 笑匠 (The Time You Need A Friend)
1985 양척로호 兩隻老虎 (Run Tiger Run)
1986 영웅본색 英雄本色 (A Better Tomorrow)
영웅무루 英雄無淚 (Heroes Shed No Tears)
1987 영웅본색 2 英雄本色 2 (A Better Tomorrow 2)
1989 첩혈쌍웅 ?血雙雄 (The Killer)
1990 의담군영 義膽群英 (Just Heroes)
첩혈가두 ?血街頭 (Bullet In The Head)
1991 종횡사해 縱橫四海 (Once A Thief)
1992 첩혈속집 ?血續集 (원제 : 날수신탐 手神探, Hard Boiled)
1993 하드 타겟 Hard Target
1995 브로큰 애로우 Broken Arrow
1996 오우삼의 신 종횡사해 John Woo's Once A Thief (TV Series)
1997 페이스 오프 Face/Off
1998 블랙잭 Black Jack (TV Series)
2000 미션 임파서블 2 Mission impossible 2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시네21 영화감독사전』 / 한겨레신문사/1999년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에이젠스테인에서 홍콩 느와르까지』 / 구회영 지음/ 한울/ 1991년
- 영화의 시대에 누구나 영화박사지만 어쩐지 홍콩영화가 좋다고 하면 공연히 주눅이 들던 시대가 있었다. 영화평론가들의 이론적이고 고리타분한 예술론이 지겨운 사람들은 이 책을 보고 자신감을 갖기 바란다.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가 제일 좋은 영화라는 사실.
『향항전영 1997년 - 홍콩영화의 이해』/ 김지석,강인형 지음 / 한울 / 1995년
오우삼, 주윤발 트리뷰트 사이트
- 오우삼과 주윤발에 대한 헌정 사이트이고, 저역시 많이 참고한 페이지입니다. 성의있게 꾸며진 알찬 홈 페이집니다. 강력 추천. 링크 역시 강력합니다.(한글)
Action Web
- 오우삼과 서극에 대한 별도의 페이지가 있다. 재주만 있다면 이렇게 웹 디자인을 해보고 싶다. 국내에서는 오우삼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서극 감독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영문)
하드보일드
- 오우삼의 홍콩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충실하게 다루고 있는 사이트다.(영문)
출처:http://windshoes.new21.org/directer-johnwo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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